용궁장의 고백
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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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언제나 결과로만 기억된다. 타오르던 순간의 격렬함, 모든 것을 삼켜버린 이후의 폐허. 그러나 <용궁장의 고백>이 오래 머무는 곳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아직 불길이 닿지 않았음에도, 이미 마음 어딘가에서 타오르고 있던 것들. ‘용궁장’이라는 낡은 공간은 오래 묵혀둔 감정들이 층층이 스며들어 스스로 호흡하는 하나의 몸처럼 느껴진다. 그곳에 쌓인 시간은 환기되지 못한 숨처럼 눌려 있고, 누구도 열어젖히지 않은 창문처럼 내부를 서서히 탁하게 만든다. 어떤 사건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감춰져 있던 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도착한다. 그날의 화재 또한 갑작스러운 파열이라기보다, 이미 지속되고 있던 균열이 비로소 눈에 보이게 된 순간에 가깝다. 불은 그저 마지막 언어였을 뿐이다. 말해지지 못한 시간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발화시킨 자리. 파국은 어느 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보류된 감정이 결국 형태를 갖추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어디까지 견디다, 끝내 무엇을 포기하고 파괴를 선택하게 되는가. 삶은 종종 버틴다는 말로 설명되지만, 그 말은 너무 쉽게 쓰인다. 버틴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관계는 어느 순간 책임이 되고, 책임은 점차 숨을 조이는 형태로 바뀐다. 그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조금씩 침식된다. 그리고 마침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면 어떤 선택은 갑작스럽게 보이지만 사실은 오랜 시간 준비된 결말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충동이라기보다, 더는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없게 된 상태에 가깝다. 더는 잃을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때 선택되는 것은 종종 삶이 아닌, 삶을 끊어내는 방식이다.

기이하게도 장례식장에는 울음이 없다. 슬픔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소진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오래 견딘 사람에게 슬픔은 더 이상 밖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표면을 떠나 내부로 가라앉아, 서서히 굳어버린다. 마치 물이 증발한 뒤 남은 자리에 염분이 하얗게 들러붙듯, 감정은 사라지는 대신 다른 형태로 남는다. 그래서 이들의 침묵은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그 안에 압축되어 있다. 말라붙은 강바닥처럼, 더는 흐르지 않지만 분명 한때는 넘실거렸던 흔적을 품고 있다. 유족들은 비극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아니, 무너질 수 있는 방식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에 가깝다. 더 이상 울 수 없다는 사실은 감정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는 증거이다. 그 침묵은 어떤 울음보다 깊고, 오래 지속된다.

이야기가 향하는 방향은 명확한 단죄가 아니다. 오히려 이해에 가까운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진다. 그러나 그 이해는 결코 편안하지 않다. 타인의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낯설어야 할 감정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지점과 마주하게 된다. 피해와 가해를 나누는 기준이 흐려지는 순간,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오래 고통받은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되는 순간, 혹은 끝내 그것을 만들어내는 순간. 그 전환은 극적이지 않아서 더 섬뜩하다. 누구도 자신이 그 경계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쩌면 이미 그 위를 지나왔는지도 모른다.

견딘다는 말은 쉽게 쓰이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소모가 따라붙는다. 사람은 무한히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버티는 동안 조금씩 자신을 잃어가는 존재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 이르면 더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조차 분간되지 않는다. 끝까지 붙잡고 있던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선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그때 이루어지는 포기는 단순한 단념이 아니다. 때로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식이 된다. 다만 그 방식이 파괴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 불은 모든 것을 앗아가지만, 동시에 오래 지속되던 상태를 끝내버린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시간을 멈추는 행위이기도 하다. 꺼진 자리에는 재만 남지만, 그 재는 단순한 잔해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끝내 견뎌낸 시간의 형태이자, 더는 이어갈 수 없었던 삶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이야기는 관계의 이름 아래 오래 자신을 소모해온 이들에게 먼저 닿을 것이다.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끝내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던 사람들. 또한 타인의 선택을 쉽게 단정 짓지 못하고, 그 이면의 이유를 끝까지 따라가 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건넨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을 버티는 일이 언제부터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는지 문득 돌아보게 된 사람이라면, 조승리 작가의 소설은 결코 가볍게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도서출판 달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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