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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 - 숲으로 걸어간 할머니, 엠마 게이트우드의 놀라운 여정
벤 몽고메리 지음, 우진하 옮김 / 수오서재 / 2026년 3월
평점 :
사람들은 삶을 시간의 규칙 속에 넣어 설명하곤 한다. 어떤 나이가 되면 시작할 수 있는 일과 시작할 수 없는 일이 나뉜다고 믿는다. 그러나 벤 몽고메리의 <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은 그 믿음을 조용히 흔들어 놓는다. 예순일곱 살의 여성 엠마 게이트우드가 어느 날 집을 나선다. 거창한 장비도 계획도 없이 간단한 운동화 하나를 신고, 작은 자루 하나를 들고 길 위로 들어간다. 그녀가 향한 곳은 미국 동부를 길게 가로지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 약 3,5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길은 당시에도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것은 도전이라기보다, 오래 닫혀 있던 문 하나를 조용히 여는 행위에 가까웠다. 어떤 삶은 거대한 결심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문밖으로 한 발짝 나가는 순간 시작되기도 한다.
이 책이 인상적인 이유는 단순히 한 여성의 여정을 따라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야기는 두 개의 시간 사이를 오가며 전개된다. 한쪽에는 열한 명의 아이를 키우며 농장의 노동을 견디고, 남편의 폭력 속에서 하루를 버텨 내야 했던 과거의 엠마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숲과 산을 가로지르며 길 위를 걷는 현재의 엠마가 있다. 저자는 이 두 장면을 교차시키며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다른 풍경 속에 놓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집 안에서의 삶이 벽과 역할로 둘러싸인 시간이었다면, 숲 속에서의 삶은 오직 한 몸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시간이다. 같은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 두 장면이 번갈아 등장할 때 독자는 묻게 된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과연 과거의 삶인가, 아니면 지금 내딛는 한 걸음인가.
걷는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오래된 철학이다. 발걸음은 늘 세계와 인간 사이의 거리를 다시 측정한다. 정지해 있는 삶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길 위에서는 드러난다.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동시에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 존재인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숲을 걷는 일이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마주하게 해 인간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린다고 말했다. 게이트우드의 여정 역시 그런 회복에 가까웠다. 그것은 자연을 정복하는 모험이 아니라, 오래 억눌려 있던 삶이 숨을 고르는 과정이었다. 길 위에서 그녀는 무엇이 되어야 할 필요도, 무엇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 단순한 반복이 삶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기울게 만든다.
사람들은 종종 그 긴 여정의 이유를 묻는다. 왜 그런 길을 걸었느냐고.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이상할 만큼 간단하다. “그냥 걷고 싶어서. 걷는 게 좋아서.” 이 말은 언뜻 보면 설명이 부족한 문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인간의 행동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변화를 꿈꾸면서도 충분한 이유가 생기기를 기다린다. 확신이 생기기를, 상황이 완벽해지기를. 그러나 어떤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충동, 아직 언어가 되지 못한 욕망, 그 미묘한 기울기가 인간을 움직인다. 게이트우드의 발걸음은 바로 그 충동의 형태였다.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밀려오는 방향 하나를 따라 걷는 것.
엠마 게이트우드의 여정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면 남는 것은 위대한 기록이 아닌 한 가지의 감각이다. 인간의 삶에는 생각보다 많은 길이 숨어 있다는 사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보지 못한 채 지나간다. 이미 늦었다는 말, 이제는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 말,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누군가가 그것을 선택하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한 노년의 여성이 그 길을 걸었다. 그 발걸음은 세계를 바꾸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남겼다. 인간의 삶에는 생각보다 늦은 순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 어쩌면 어떤 길은, 바로 그 늦었다고 믿는 순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요조앤 이 모집한 서평단에 선정되어 수오서재 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