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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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긴 읽었고 쓰긴 써야겠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열쇠>를 읽고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왜 거장인지 알겠다고 까지 했는데, 솔직히 나는 정말 모르겠다. 이건 그냥 마치 음, 변태적인 치정극일 뿐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56세의 남편과 45세의 아내는 이미 이십 여 년 간을 함께 살아왔고, 스물이 넘은 딸도 하나 있다. 남편은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써왔지만, 그동안은 금기시해왔던 자신들의 성생활에 관해 56세를 맞는 새해 벽두부터는 과감하게 적기로 한다. 그간은 혹시라도 아내가 읽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를 삼가왔지만, 이제야말로 아내에게 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오히려 읽히기를 기대하며), 일기를 쓰기로 작심한 것이다. 아내 또한 이에 화답하듯이 자신들의 성생활에 관한 일기를 쓰기로 하는 데, 그 이유는 이렇다.

 

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속내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하다못해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말하거나 들려줄 필요가 있다. 단지 나는 자신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들키는 바보짓은 하지 않는다. 나는 남편이 외출해서 없는 틈을 타서 일기를 쓰고, 남편이 절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어떤 장소에 숨겨둘 것이다. 내가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첫 번째 이유는, 나는 남편의 일기장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반면, 남편은 내가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는 그 우월감이 더할 나위 없이 즐겁기 때문이다. (15)

 

 

왜 일까, 이십 여 년을 함께 살고도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부부 사이의 화두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십 년이 지난 부부사이에도 성생활이 중요한 것이기는 할까? 56세의 남자가 탐하는 것이 45세의 아내가 아니라 차라리 다른 여자였다면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사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성이 없다.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6개월 동안 이들 부부에게는 일반적인 생활이 없다. 그저 성적 욕구와 배설만 있을 뿐이고, 그를 위해서는 딸도 제자도 모두 도구가 될 뿐이다(사실은 딸과 제자의 성적 만족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 것이 이들 부부일지도 모른다).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매혹도 없이 그저 뿐으로, 그것이 이 소설을 읽는데 가장 큰 난점이었다. ‘변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작가가 현실성이 없는 성생활에 대해 집중한 것은 그것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일 텐데, 그것에 도대체 정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소설의 내용이 난잡하다. 다만 자신이 고지식하고 봉건적인 사상을 가진 전통적인 여인상인 것처럼 남편을 속여온 여자의 마지막 일기는 소름이 돋는다. 반드시 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뿐이라는 것이 유일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57세에 쓴 <세설>은 전쟁과 무관하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네 자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다루었다. 도저히 오십 대 후반의 남자가 썼다고는 보여지지 않는 여자의 심리에 대한 세심한 묘사가 좋았다. 때문에 <세설>을 읽는 것은 특별한 스토리가 없는 일일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아늑했다. 반면, 작가가 70세의 나이에 썼다는 <열쇠>는 해소되지 않는 노년의 성을 대리만족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퇴폐적이다. 무엇보다 매혹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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