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비극 - 상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5
디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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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인 너무나도 통속적인

빈곤하고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남자가 부유한 여자를 이용해 신분상승을 꾀하고, 그에 걸림돌이 되는 가난한 애인을 걷어차는 이야기는 문학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흔하디 흔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비극>은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내용인데,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 이야기의 소재를 신문기사에서 얻었다. 1906년 뉴욕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로, 광신적인 부모 밑에서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빈곤하게 자란 한 남자가 역시 마찬가지로 가난한 여공을 유혹하고 임신시켰다. 그러나 그후 미모와 재물과 지위를 겸비한, 그리하여 자신을 상류사회로 이끌어줄 새로운 애인과의 교제에 그녀가 방해되자 호수로 여자를 유인, 테니스 라켓으로 머리를 쳐 익사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씌여진 <미국의 비극>은 이토록 간단한 이야기지만, 상·하로 나뉘여 도합 1,000쪽에 이른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크라이드의 성장기를 비롯한 각각의 장면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 변화에 대해 매우 세밀하고도 반복적으로 묘사했다. 그로인해 소설은 다소 장황하고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다는 반전없는 뻔한 결과 때문에 그의 첫 장편 <시스터 캐리>보다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시스터 캐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비극> 역시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것을 향한 주인공의 욕망과 갈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보편적 인간의 고뇌로 이어지면서 마치 나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때문에 다소 지루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한번 잡은 책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지위도 돈도 뭐든 갖춰져 있거든요, 팔자가 좋은 거죠. 그와 반대로 난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목적을 달성하기란 여간 힘이 들지 않아요. 더욱이 그 여자들을 상대로 돈과 신분에 대항해 나가야만 하니까……(상권 424쪽)

죄책감은 학습의 결과?

어린 크라이드는 전도관을 열고 가족을 전부 동원해 가두 설교를 일삼는 부모의 광신적인 행위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성장했다. 뿐만아니라 그처럼 열성적으로 믿고있는 하나님은 실제로 자신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증거로 돈벌이를 등한시한 부모의 전도 생활 때문에 그의 가족은 늘 궁핍했던 것이다. 이에 크라이드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로 부터 벗어나 직접적인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부모가 강요하는 보답없는 신앙생활보다는 일반적인 시류, 즉 물질을 쫓는 것이 젊은이다운 생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도 상대적 박탈감에 몸서리치는 보통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특별한 철학이나 목표없이 동료들과 어울려 그때그때의 즐거움을 맛보고, 흐르는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상류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닥치고, 크라이드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양심을 버리기로 한다. 그것이 한때나마 사랑했던 여자를 죽이는 일 일지라도.

 

크라이드는 처음엔 공포에 부들부들 떨면서 무서움에 가라앉은 속삭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마치 철인과도 같은 초연한 태도로 바뀌고 말았다. 마치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광포하고도 악마적인 방법이라도 허용되어야만 한다는 그러한 배짱을 이미 세워버린 것 같이도 보였다. 사실 그는 단념하려 해도 단념할 수 없는 꿈과 환락을 앞에다 놓고서 그만 그 유혹에 지고 말아, 그 방법이 자못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저 한 번만 그 흉행을 결행하면 모든 욕구와 꿈이 실현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하권 74쪽)

가난과 궁핍에 더해 신을 향해 늘 죄인의 모습일 것임을 강요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한 크라이드는 임신까지 한 가난한 애인을 죽이고서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의 순간 순간적인 정신분열을 일으켜 자신은 살인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녀의 죽음은 우연의 결과라고 자신을 속이기까지 한다. 광신적인 부모의 전도 생활을 부끄럽게 여겼다고는 하지만, 낳아서부터 들어오고 배웠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나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자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과잉된 강요가 그로부터 종교적 믿음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양심의 싹조차도 잘라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경우 크라이드의 부모는 자식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아니 오히려 자아가 제대로 설 수 없는 강요된 환경으로 인해 아들이 죄악의 구분 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밀어넣고는 제대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의미하는 것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양심도 없고, 몰지각하며, 자기 욕망을 위해서라면 임기응변적이고,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권위 앞에서는 겁쟁이인 크라이드에게 많은 공감을 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신에 대한 부모의 경외를 의심하는 크라이드, 남의 목숨은 앗았을망정 정녕 자신은 죽고싶지 않다고 울부짖는 크라이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당장 도망부터 치고보는 크라이드, 들키지만 않는다면 거짓말도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크라이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벌인 옳지 않은 일에 대해 죄책감을 갖거나 후회하는 대신 그 모든 것이 자기만의 잘못이냐고 되묻는 크라이드, 그리고 끝내는 강요당하는 죄책감 보다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크라이드. 부족하고 못날 뿐만 아니라, 부정하기까지 한 그의 모습은 누가 보고 있지 않을 때 본능적인 욕망에 갈등하며 고뇌하는 나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드라이저는 크라이드의 이야기는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가 빚어 내는 전형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왜냐하면 사회가 권장하는 가치관이 그 가치관을 따를 수 없는 무능력자들에게 오히려 가장 욕구를 충동시켜 주고 있으며, 이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무능력자들은 온갖 제약을 받고 끝내는 범죄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권 517쪽, 작품론 중)

소설의 제목이 '크라이드의 비극'이나, '개인적인 비극'이 아닌 '미국의 비극'인 것은 출세와 부, 권력, 야망으로 상징되는 시류를 쫓느라 자신을 잃어버리는 현대사회의 인간을 '미국'이라는 이름에 담았기 때문이다. 만약 크라이드가 로버타를 죽이고도 들키지 않았다면, 그래서 상류사회의 여자인 손드라와 가정을 꾸미고 무난히 상류사회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크라이드는 상류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는 성실한 인간군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럴수 있었다 해도 그는 그외의 더 많은 것을 욕망했을 것이고,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했을 것이며, 수중의 것 중 무엇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때로는 갖지 못한 것 때문에 몸 달아 했을 것이며, 갖았거나 갖고싶은 것을 위해 양심을 버리고 자신조차 속이는 일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1차세계대전 후 황금기를 누리던 1920년대 미국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고 드라이저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욕망만이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준이 되어 안달복달하며 삶을 꾸리는 것이 1920년대의 미국의 일만은 아니므로, 크라이드의 욕망에 공감하는 독자는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것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

<시스터 캐리>를 읽고, 인간의 욕망에 집중하는 드라이저의 소설에 매혹되어 <미국의 비극>을 읽었다. <시스터 캐리>를 읽을 때, 혹여 소설이 신문기사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그대로 내 추측이었을 뿐이고, <시스터 캐리>는 드라이저의 누나 에마로부터 출발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미국의 비극>을 읽으며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신문기사를 토대로 씌여진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다소 놀랐다. 역시 소설가는 한줄의 기사에서도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천재라는 내 견해는 옳다. 한편,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다른 책들도 읽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출간 된 것은 단지 <시스터 캐리>와 <미국의 비극> 이 두 편 뿐이지만, 조만간 <제니 게르하트>니, <금융업자>, <천재>, <금욕주의자>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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