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가을은 겨울로 넘어가던, 파르바네와 패트릭이 오베의 집 우편함으로 트레일러를 후진시킨 지 거의 4년이 되던 11월의 어느 싸늘한 일요일 아침, 파르바네는 누가 얼어붙은 손으로 자기 이마를 만진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 15분이었다. 오베의 집 밖에 쌓여 있던 눈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447쪽

 

오베와 임신한 이웃 여자인 파르바네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한 것일까. 그들이 주고받은 감정은 이웃간의 우애 또는 아버지를 잃은 이방인 여자와 자식도 없이 홀로된 아빠뻘인 남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온당한 애정 같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나눈 것은 명백한 남녀 간의 사랑이 있었노라고 주장하고 싶다. 인구 9백만의 스웨덴에서 70만 부 이상의 판매를 올리고 독일, 영국,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는 이 책을 사랑에 방점을 두고 읽은 사람이 단지 나 하나 뿐이라고 할지라도, <오베라는 남자>는 연애소설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겠다. 다만 오베와 파르바네 간의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녀 사이의 연애 감정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인 사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는 묻겠지. 사랑 그 자체인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이냐고.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뭐랄까 육체적 끌림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따뜻한 포옹을 꿈꾸는 무성의 애정상태?

 

한편의 시트콤처럼 명랑 쾌활 유쾌 통쾌한 <오베라는 남자>를 힘들게 읽었다. 첫 장부터 오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원칙을 중요시하며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처음보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누가되었든 일단 반감부터 품고 보는 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자신 그 자체가 자랑인, 세상은 흑과 백이 아니라 다종 다양할 뿐만 아니라 호화찬란하기까지 한 색채가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오십구 세의 남자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전철에서 혹은 은행에서, 길을 가다가, 또는 식당에서 숱하게 부딪히는 권위적인 얼굴의 남자들을 오베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원칙만을 소중히 여기는,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반면 자신이 무시당하는 상황은 절대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에 갇힌 권위로 똘똘뭉친 완고한 남자들의 얼굴을. 

 

뭐든 간에 발길질을 하면서 물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남자(15쪽) 오베는 아무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쓰레기장과 자전거 보관소를 관리하고 주차금지 구역을 시찰하며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앞장서지 않는다면 무정부적 혼란이 벌어질 것(16쪽)이라고 믿는 원칙주의자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까칠하다거나 사회성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한편으로 트레일러를 제대로 주차시키지 못하고 사다리도 잘타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임신한 여자를 돌보고, 마녀같은 이웃집 여자와 그녀의 개에게 쫓기는 상처받은 고양이를 거둬들인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 고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에게는 자전거 고치는 법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청년에게는 잠잘 곳을 내주기도 하는 자상한 사람이며, 육개월 전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는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오베는 울타리 안에서 원칙을 세우고 체계를 잡는 권위자이며, 가족을 돌보고 그들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감싸기도 하는 한마디로 이상적인 아버지 상 인 것이다.

 

삼십대 중반의 젊은 작가답게 첨단의 기기를 이용해 글을 쓰는 유명 블로거인 작가는 어째서 오베와 같은 원칙주의자를 불러낸 것일까. 북유럽의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스웨덴은 수십 년 전부터 난민을 비롯한 다양한 이민자들을 받아들여왔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대표적인 다문화국가가 되었는데, 당연히 이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스웨덴인들은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이민자들이 복지혜택을 받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이민자들은 이민자들대로 스웨덴인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며 크고 작은 소요를 일으키기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 아수라장을 해결하는 데는 가족을 돌보고 상황을 통제할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한편으로 약자를 보호하는데 앞장서는 히어로가 필요한 상황을 오베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것을 간파한 스웨덴의 독자들은 오베에게 열광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오베와 같은 원칙주의자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받는다. 자신은 남자이며, 아버지라는 것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들 때문에 내가 받을 몫을 손해본다고 느끼는 유럽인도 아니고, 아버지의 권위가 세상을 구한다고 믿는 근본주의자도 아닌 나는, 여전히 이 이야기를 연애소설로 읽는다. 자신이 통제하는 상황을 즐기는 오베는 전형적인 상남자이다. 남편을 따라 멀리 스웨덴까지 온 이방인 파르바네는 그런 오베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강한 남자를 본 것이다. 여자이고, 임신한 상태이며, 이민자인,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고, 힘이 없어 핍박받는 사람을 보호하며, 맨손으로 라디에이터를 고치는 오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상, 안전, 보호 따위의 욕구를 사랑으로 착각한 파르바네의 모습에서 그 옛날, 아빠의 동료를 좋아했던 어린 내 모습을 본다.

<오베라는 남자>는 나에게 엄연한 연애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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