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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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과 食口

글자만 놓고 본다면 가족과 식구는 엄연히 다르다. 가족은 혼인으로 시작하여 혈연, 나아가서는 입양으로 인해 묶인 사람들을 일컫지만, 식구는 말그대로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직장, 한단체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해피 패밀리>에 등장하는 유치원생 지현이 아빠인 민형에게 식구에 대해 물었을 때, '같이 살며,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건조하지만 명쾌한 답을 내놓았더라면 함께 살고 있는 외할머니를 식구라고 하면서도, 함께 살고있지 않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그리고 고모들을 식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에 식구와 친척을 구별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것이고, 세상에는 잘 알지 못하겠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아빠의 설명을 납득하지 못한 지현이,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자기 식구에 대한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형이 짧고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면, 유치원생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따지고 보면 세상사람들 모두가 한식구이며, 더 나아가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하나에서 출발한 한식구'라는 외할머니의 대답에 자기가 좋아하는 꽁치 구이를 먹어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았을텐데. 지현은 분명 "우리 식구는 몇 사람인거야?(177쪽)" 라고 물었으니까.

 

유치원 아이의 질문이라고는 하나, 가족과 식구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기는 어렵다. 가족과 식구는 정말 같은 것일까? 가족을 혈연이나 서류로, 식구를 한지붕 아래서 실제 밥을 같이 먹는 관계로 규정한다면, 결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구성할 때는 어디까지를 식구로 보아야 하는 걸까? 친정과 시댁의 구성원들 모두를 식구라 여겨야 하는 것이 맞다는 건 알겠지만, 실지 그들 모두 각자각자가 한가족이라고 여기고 행동할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직계 부모와 형제를 빼면 잘 알지 못하는 사촌들이 그득한데도 그들도 모두 식구라해야는 걸까? 따로따로 가정을 갖고나면  부모와 형제조차도 이름만 식구인건 아닌가?

 

며느리의 자리

가족이라는 이름은 참 버겁다. 자라면서 살가운 정을 느껴보지 못해서인지 결혼 후로는 친정도 내 식구 같지 않고,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만나면 서로 살뜰한 정을 나누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낯설다. 엄밀히 말하면 시댁식구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은 남편이라는 고리를 빼면 생판 남인 것이니까. 민형의 아내 현주는 시부모들로 부터 '복덩어리'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며느리 노릇을 훌륭히 해 내며, 두명의 시누이들과도 때로는 친자매로 보여질만큼 무척 사이가 좋다. 그런 현주는 시댁 식구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독백한다.

 

내 위선은 지혜로운 위선이다. 가족들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위선. 가족들 사이에 사랑을 만들어내는 위선. 비록 그 평화가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위태한 것이고, 그 사랑이 보기에만 아름다운 치장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82쪽).

 

현주의 위선이 지혜이든 가증이든 어쨌든 가족간의 평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 위선이라고는 하지만 현주가 딱히 시댁 식구들이나 남편에게 어떤 불만이 있거나 겉다르고 속다르게 행동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더라도 입안의 혀처럼 굴며 시어머니의 비유를 맞추는 현주를 보노라면 며느리라는 자리가 무슨 벼슬도 아닌데 우리의 며느리들은 어째서 이토록 끊임없이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건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서만 주어지는 평화라면 그 평화는 언제나 늘 위태로울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말이다. 한민형은 아내가 만들어내는 위선적인 평화에 대해 튼튼한 낙관주의라고 이름하며, '그것이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노력할 수 있는 능력과 기질은 타고난 것일터'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한민형의 생각은 자기 편하자는 생각일뿐, 타고난 기질이 아니더라도 가족의 평화가 곧 나의 평화라는 동일시를 끊임없이 세뇌 당해온 결과로 서현주라는 인물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싶어 씁쓸하다.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름, 가족

한민형으로 부터 시작되어 각자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해피 패밀리>의 차례를 보며, 한민주와 한영미가 같은 해에 출생했길래 쌍동이 자매려니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한민주는 친 딸이고, 한영미는 입양한 딸이다. 그녀들의 엄마인 민경화는 민주와 영미를 드러내놓고 차별했는데, 그 모습에서 딸과 며느리를 대하는 일반적인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드러내놓고 차별하진 않지만 언제나 점잖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방관하고는 나중에서야 아내의 잘못을 꼬집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한진규의 모습에서 우리네 시아버지들의 모습 또한 보았다. 딱히 고약한 시부모가 아니더라도 며느리를 대하는 마음이 딸을 생각하는 마음과 같을수는 없다. 그렇다고해서 그것을 잘못이라고 못박을 수도 없다. 그러나 감정을 속이고 위선의 탈이라도 써야하는 서로 간의 과도한 책임에 대해서라면 그것만은 정말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희생을 끊임없이 필요로하는 일이니까.

지나친 사랑, 과도한 책임, 그로인한 과장된 평화는 친자식 친부모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바라는 어떤 것들은 순수한 사랑이기보다는 부모 자신의 욕심이거나 이기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는 물론 부부간의 사랑에도 유효한 이야기다. 이를테면 남편이 법조인이 됐다면 자신이 남편을 더 사랑했을 것(70쪽)이라는 민경화의 솔직한 독백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들의 모습은 몹시 속물적이고 천박하지만, 어느 누구인들 양심의 가책없이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책 속의추함이 현실의 추함을 따라잡는 법은 거의 없다. 책 속의 비참함이 현실의 비참함을 넘어서는 법도 거의 없다(9쪽)'. 라고 한 작가의 말처럼 근친상간 쯤이야 이제는 문학에서 진부한 소재로 치부되곤 한다. 따라서 <해피 패밀리>의 결말은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 놀랐다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 이런일이...'라는 극단이나 막장이 아니라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행하는 위선과 착취에 대한 것이였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환치되는 착취야말로 너무 뻔한 수법이 아니겠냐는 말도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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