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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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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히스테리보다 더 괴상망측하네. 마치, 뭐랄까, 뭔가 달라붙어서 집안사람 전부의 생기를 천천히 빨아먹는 것 같아."

"뭔가 있긴 하지." 그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 이름은 바로 노동당 정부고. 에어즈가 사람들의 문제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할 생각이 아예 없다는 거야. 오해는 말게. 나도 그 사람들 심정에 상당히 공감하니까.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그들처럼 오래된 잉글랜드 가문에 남은 게 뭐겠는가 계급적인 면에서는 운이 다했지. 정신적인 면에서는 아마 전혀 바뀌지 않고 그저 살던 대로 살 걸.

그는 어느새 피터 베이커하이드처럼 말했고, 나는 그의 활달함이 좀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나와 달리 그 집안사람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했으니까.(539쪽)

그저 단순한 친구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진정한 친구라 일컫는 사람을 조심해얄 것이다. 뒤통수를 치는 이는 나름대로의 걱정과 과도한 친절을 세트로 묶어 무한 발사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장해재하게 만드는 이들이고 보면.

2차세계대전 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영국의 귀족 가문인 에어즈 가의 주치의 그레이엄은 하녀가 배탈이 났다는 연락을 받는다. 때마침 응급환자를 보던 중이던 그레이엄은 파트너 의사인 패러데이에게 에어즈 가의 저택인 헌드레즈 홀을 방문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후로부터 줄곧 에어즈 가의 주치의가 된 닥터 패러데이는 어느덧 에어즈가 사람들과 진정한 친구 운운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패러데이의 생각이고, 에어즈 부인만해도 그녀에게 있어 패러데이는 에어즈가의 아이들을 돌본 유모의 아들이며, 가족의 건강을 돌보는 주치의 이상은 아니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패러데이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에어즈가의 장녀 캐럴라인은 어땠을까. 패러데이의 관심이 자신보다는 자신의 배경 즉, 몰락의 길로 들어선지 이미 오래지만, 어쨌든 유서깊은 영국의 귀족이며 대지주인 가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이전부터 그녀는 패러데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패러데이는 동생 로더릭의 일을 비롯하여 저택에 위험스런 일이 생길 때마다 캐럴라인과 그녀의 어머니를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지만, 정작 캐럴라인은 패러데이에게 진심을 열어보이지 않는다. 사려깊은 배려라기엔 지나친 패러데이의 오지랖을 보며 질린 면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태생적으로 캐럴라인의 피부에 스며있는 계급의식이 무의식 중에 작동했던 것은 아니였을지.  

 

시대착오적 인물들

이 소설의 매력은 무엇보다 시대착오적인 등장인물들에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패권은 미국과 소련에게로 넘어가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였으며, 따라서 귀족들에게도 더이상의 귀족놀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경제적 위기에 몰린 그들은 저택과 농지를 처분했으며, 노동당은 귀족들에게도 배급표를 지급했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일부의 귀족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에어즈 부인 또한 가문이 몰락해 가는 와중에도 귀족적인 삶과 정신을 버리지 못한다. 장남인 로더릭 역시 쓰러져가는 에어즈가의 주인 역할을 맡으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저택과 농지를 유지하며 가문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부터 그는 서서히 미치광이가 되어간다.

한편 에어즈 가에서 부리던 유모의 아들인 닥터 페러데이 역시도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선망해 온 에어즈 가의 가족이 되기 위해 노심초사 한다. 노동자 계급이었던 부모를 넘어서 자수성가한 그에게 있어 에어즈 가는 새로 시작되는 패러데이 가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줄 것이었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에 반해 오직 한 사람, 시대의 변화에 발 맞춰 변화를 꿈꾸었던 캐럴라인은 최선을 다해 저택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저택과 영지를 모두 처분하려 한다. 실질적으로 가문을 유지시키는 수단인 저택과 영지를 버리는 것은 귀족이라는 이름의 명예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삶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다. 몰락한 귀족이며 명색만 대지주의 딸인 캐럴라인은 그 외모에서 부터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동네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활달한 편"이라거나 "천생 노처녀"라거나 "똑똑한 아가씨"라고 하는 소리를 이따금 들었다. 그 말인즉슨, 참 인물없고 여자치곤 키가 크며 다리와 발목이 굵다는 뜻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 머리칼은 잘만 관리하면 꽤 예쁠 것도 같은데 한번도 단정히 꾸민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날도 흡사 세탁비누로 감은 다음 빗질을 잊은 것처럼 부스스했다. 게다가 그렇게 패션 감각이 없는 여자는 난생처음 봤다. 남성용 같은 플랫샌들에 옷맵시가 영 나지 않는 옅은 색 원피스는 튼실한 엉덩이와 커다란 가슴을 전혀 살려주지 못했다.(22쪽)

문학에서건 영화에서건 이처럼 투박하게 그려진 귀족 처녀를 처음 보았기에 캐럴라인의 모습이 처음에는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껏 봐온 스러져가는 운명 속의 그녀들은 왕자 비슷한 남자를 만나 때를 벗고 머리칼을 정리하면 기가막힌 미녀가 되곤 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하는 캐럴라인은 아무리 머리칼을 곱게 정리하고 나긋나긋한 옷을 입는다해도 변하지 않을 큰 키와 굵은 발목을 지녔다. 물론 그녀는 얼굴도 예쁘지 않았고, 어딘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작가가 주인공이며 무려 귀족인 캐럴라인의 외모를 이렇게 그린 것이 나는 무척 재미있게 여겨졌는데, 세라 워터스는 튼튼한 두 다리로 현실의 땅에 굳건히 설 인물은 캐럴라인 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진정한 공포, 감정이입

시대착오적 인물들과 시대착오를 벗어나려는 캐럴라인, 그리고 운명을 다한 저택이 맞물리면서 빚어내는 공포가 제법 쏠쏠하다. 그러나 등장 인물들 중 그 누구에게서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한 나는 철저히 관객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다. 그랬기때문에 708쪽에 이르는 긴 이야기를 읽는 중, 휘몰아치는 광기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줄곧 지루해지곤 했다. 스릴러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무엇보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를 제대로 느낄수 있어야 한다. 등장 인물 중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투영했다면 좋았겠지만, 공포 소설을 즐기지않는 나는 무의식 중에 관객의 입장을 고수하며 적절한 선을 유지했기에 조금은 심드렁할 수 있었다. 덕분에 "헌드레즈와 관련된 누군가의 불안정한 무의식이 낳은 사악한 씨앗, 탐욕스러운 그림자, 어떤 낯선 존재에게 이 집 자체가 잡아먹혔다는 가설(707쪽)"의 주인공을 찾는 일이 너무나도 쉬웠다. 물론 작가는 끝까지 정답을 보여주지 않았고, 나는 다만 상상할 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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