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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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인식되어지는가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간단하다. 누군가 지금부터는 '코끼리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라고 하면, 당연히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 먼저 대상을 인식해야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오른 코끼리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부터 결코 코끼리로부터 놓여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프레임을 활성화하면서 대상을 인식하거나 그와 관련된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대상을 부정할 때도 이 프레임은 작동하는데, 자주 활성화될수록 프레임은 더욱더 확고해 진다. 인지언어학의 창시자이며, 언어학자인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 공식이 보수 세력에 의해 정치에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세금'이라는 말이 '구제' 앞에 붙게 되면,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은유가 탄생한다. 과세는 고통이다. 따라서 이 고통을 없애주는 사람은 영웅이고, 그를 방해하는 자는 나쁜 놈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이다.(22쪽)

2001년 조지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세금 구제'라는 단어는 언론을 통해 퍼져 나갔고 활성화되었으며, 이후 민주당에서까지 세금 구제란 말을 쓰면서 '중산층을 위한 세금 구제'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진보주의자들까지 보수가 놓은 '세금은 고통'이라는 덫, 즉 보수주의의 프레임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세금은 국가를 움직일 자원일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장기적으로 세금은 공적 차원에서의 인프라를 구축해 사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할 뿐만아니라, 기업을 비롯한 산업사회가 번성할 기반을 조성한다. 또한 사회복지 프로그램, 즉 유아 교육을 비롯해 빈곤층을 위한 사회안전망과 실업 보험, 의료 보험, 노인 연금 등을 운행할 재원이 세금인 것이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공화당은 바로 이러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낭비성 지출로 보고 이를 삭감해 세금을 낮추자는 식의 '세금 구제'를 주장한 것이다. '구제'라는 단어가 주는 영웅적인 이미지에 의해 '세금'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고, 세금을 자원으로 하는 사회적 차원의 보살핌을 기본 가치로 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조차도 '세금 구제'라는 프레임이 무의식 중에 작동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무상급식 논란

'무상'이라는 말이 '급식' 앞에 붙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무의식이 발휘된다. 국가에서 주는 '무상'은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일해서 벌지 않은 것은 사람들을 나태하게 하고, 거저 얻어지는 것에 대해 절제할 줄 모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비도덕적인 인간상을 만들기 때문이다(보수우익쪽의 한 언론인은 자신의 컬럼에서 '무상급식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좌익 세력은 '악의축''이라는 표현까지 썼으니,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는 무상급식은 참으로 대단히 못된 주장이었던가 보다). 따라서 훈육을 잘 받아 권위에 복종하고, 사익을 추구하며 부와 자립을 이루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만들기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의 학교 급식은 '유상'으로 지급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바로 2011년 서울의 교육감 선거와 지방선거를 앞두고 불거졌던 '무상급식' 파동 때 사용되었던 보수주의자들의 프레임이다. 이른바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야당은 여당의 이러한 프레임을 받아들여, 변함없이 '무상급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모든 학생들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될 급식을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궁금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되는 학교급식이 어째서 무상이란 말인가. 무상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짜' '게으름', '나태', '의존적'과 같은 부정적 의미를 야당은 어째서 그대로 차용하는가 말이다.  낱말 즉 언어를 통해 프레임을 인식한다는 조지 레이코프의 이론에 근거하면 보수가 사용한 부정적 단어인 '무상'의 덫에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민주당마저 코가 끼인 상황이 된 것이다.

진보주의 세계관은 평등과 자유를 기본가치로 하며, 돌봄을 통한 유기적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의 야당이 진정한 진보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면, 보편적인 교육환경에서 기회의 균등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돌보고 나누는 가치를 배울 수있는 학교급식에 관한 새로운 프레임을 형성할 수는 없었을까. 교육이 지식과 기술의 습득만이 아니라, 유기적인 인간관계를 통해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힘이라는 것을 상식으로 믿는 진보주의이라면 말이다.

 

보수주의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저자는 완벽하게 사익의 극대화를 위해 헌신하는 보수주의를 '엄격한 아버지'모형으로 설명했다. 보수주의자들은 험한 세상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승자가 된 사람들을 선한 사람으로, 훈육을 제대로 받지못해 자기 자신조차도 돌보지 못하는 의존적인 사람을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본다. 이와같은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사람들의 재원으로 마련된 세금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 그들의 가치이다. 흔히 생각하듯 보수주의자들이 탐욕과 비열함으로 철면피를 두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도덕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과의 소통은 감정적으로 격하게 대응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태도로 이야기를 경청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말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추구하는 도덕적 가치와 이념이 다른만큼 수긍할 수 없는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은 때로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중하고 경청하되 정당한 분노를 품고 이를 표출할 줄도 알아야 하며, 이때 표현되는 분노는 절제된 방식이어야 한다. 

 

보수주의자와의 토의에서 보여야 할 진보주의자의 태도에 관한 지은이의 주장을 읽으며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TV로 생중계되었던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의 이정희 후보가 생각났다. 일부 측근 외에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박근혜 후보의 이른바 불통의 정치를 비롯해, 그와 얽힌 과거사 문제 등을 조목조목 따지는 이 후보의 명철함은 빛이 났다. 그러나 목소리 톤을 높이고 낯빛을 붉히면서 까지 '박 후보의 낙선을 위해 나왔다'라고 한 다분히 공격적인 그의 언사는 이 후보의 반대자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중도적 입장의 사람들에게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쳐졌다.

허를 찌르는 이 후보의 질문에 박 후보는 답변이 궁색할 지경으로 수세에 몰렸지만, 그건 박 후보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후보의 전투적인 태도에 놀라 당황한 어른(장유유서의 관점에서)의 모습으로 비쳐졌으며, 이 후보의 명철함은 오히려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개인적 감정을 앞세운 비난으로 보일 정도였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가 대통령 선거 직후인 2012년 12월 22일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보수 표심의 결집 원인에 대한 응답 중 '이 후보의 공격적 TV토론 태도'가 31.0%로 가장 높았다(2012년 12월 23일, 경향신문). 이러한 결과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권위에 대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기본가치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온 대한민국에서 보일 수 있는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가족을 보호하고 이끌어야 하며, 그러한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은 유교를 근간으로 한 조선시대로 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상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프레임에 갇혀있는 50대 이상의 중장년층 중 다수의 사람들이 보기에 이정희 후보의 태도는 정당한 권위(박근혜 후보는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에게는 한때 영부인의 역할을 했던 최고 권력이었으므로)에 도전하는 부정적인 이미지였을 것이다. 이에 가정과 국가를 하나로 이해하는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은 자신과 국가의 존폐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며,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표심을 집결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름으로 추측해 본다.

레이코프는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가 믿는 흔한 속설로, 사람들은 진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219쪽)라고 역설한다. 이 후보가 대한민국 국민 앞에서 당찬 목소리로 진실을 열어 보였지만, TV토론을 본 많은 사람들이 본 것은 그의 손가락이었다. 이 후보가 선택해야 한 것은 장렬한 전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며, 한번 자리잡은 프레임은 왠만해서는 뒤바꾸기 힘들다

때문에 진보는 이제라도 보수와의 프레임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순간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 갈릴 때마다 스스로도 자신의 주장에 대해 자신없이 물러나곤 한다면 꼭 한번 읽어볼만 한 책이다. 또한 서민들이 어째서 자기이익에 반하여 부자들을 위한 투표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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