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오 영감 을유세계문학전집 3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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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의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혼란스럽고도 횡재스러운 시기에 명민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성공한 고리오는 일종의 신흥 벼락부자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일찍 잃은 고리오는 남겨진 두 딸에게 몹시 집착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두 딸의 욕망을 언제나 선수쳐 만족시켜 주었는데, 과자를 탐하던 어린 두딸은 어느덧 자라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고리오는 이때에도 딸들에게 재산을 후하게 분배해 큰 딸은 백작 부인이 되었고, 작은 딸은 은행업자와 결혼해 더더욱 큰 부자가 되었다. 그녀들은 그후 파리의 사교계를 드나들며 당시의 풍속대로 애인을 만들고 사치를 즐기며 쾌락을 탐했는데, 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를 찾았다. 딸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했던 고리오는 자신의 전 재산과 연금까지 팔아 그녀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러나 그 많던 고리오의 재산도 바닥을 보이는 날이 왔고, 그와 함께 늙고 병든 고리오의 죽음도 찾아들었다. 이제 빈털털이가 된 고리오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는데, 돈이 필요할 때면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며 아버지의 비유를 맞추던 딸들은 정작 노인의 죽음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고, 고리오는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을 맞는다. 그순간 고리오가 머물던 여인숙의 1층 식당에서는 그들만의 비루한 식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파리라는 멋진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의 하나는 아무의 관심도 받지 않은 채 태어나고, 살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이오. 그러니 문명의 이런 혜택을 누립시다. 오늘만 해도 죽은 사람이 60명은 될 텐데, 이런 파리의 대 살육에 모두 애도를 표하겠다는 거요? 고리오 영감이 끝장났다면, 차라리 본인에겐 잘된 일이지! 영감을 사랑한다면 가서 지키시고,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식사하게 좀 놔두시오. (399쪽)

 

고리오의 이런 비참한 이야기는 같은 여인숙에 머물던 청년 라스티냐크에 의해 관찰되고 증언되어지는데, 라스티냐크는 시골에 작은 영지를 가진 소귀족의 큰 아들로, 그는 가족의 희생을 딛고 출세를 위해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법률가로 소소한 출세를 하기보다는 사교계를 드나들며 유명한 부인과 연애사건을 일으킴으로써 단번에 상류사회로 진입할 것을 맹세하고, 고리오의 작은딸에게 접근한다. 과연 그는 고리오와 그의 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딸들을 향한 고리오의 무분별한 사랑과 그를 대하는 딸들의 냉랭한 모습에서 돈을 매개로 하는 가족을 비롯한 인간관계의 비루함을 몸소 체험하며, 자신이 속하고자 하는 파리사회의 비정함에 대해 많은 망설임과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라스티냐크는 고리오의 죽음과 함께 세상 물정을 모르던 청년다운 열정도 함께 묻는다. 그리고 그는 파리를 향하여 '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 라고, 출세주의자 다운 다짐을 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고리오 영감>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잘못 키운 자식에 대해 회의를 느끼듯, 나 역시 '부모와 나', '자식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모로 부터 받은 것이 많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여타의 모든 자식들과 비슷하고, 자식에게 할수있는 한 많은 것을 주려한다는 것 역시 세상의 모든 부모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것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란, '부모와 나'의 관계이든' 나와 자식'의 관계이든,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필요한 것과 필요할 것을 규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가. 자식의 입장에서 나는 부모가 내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다고 여겼고, 부모의 입장이 되자, 자식에게 필요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주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다.

방관이 아닌듯 방목하며 자식을 돌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노년을 자식에게 마낄 심사가 아니여도 그렇다. 저택을 물려줄 수는 없겠으나, 울타리는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제법 건강해 보이는 생각까지도 자식에게는 지나치다. '그들은 내가 아니고, 하물며 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라는 것이 <고리오 영감>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한편 발자크는 '인간극'을 기획했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라스티냐크는 <고리오 영감>외에도 발자크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등장하며, 이야기의 고리를 이어간다. 발자크는 이와같은 '인간극'을 통해 당시 사회의 풍속을 그리고자 했다. 그는 90여편의 인간극을 완성했으나, 그가 처음 구상하며 세웠던 130편의 기획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전체를 다 읽은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발자크의 인간극은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를 떠올리게 하는데, 졸라의 <제르미날>을 읽고, <목로주점>, <니나>를 이어서 읽었지만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의 딸 니나가 소설 <니나>로 이어지는 식으로)가 이어진다는 것 외에 특별한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혈연이나 별다른 관계가 아니어도, 어차피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인간극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발자크의 끊이지 않는 작품에 대한 열정은 가히 놀랄만한 것으로, 그는 하루에 수십 잔씩 커피만 마시며 전혀 잠을 자지 않은채로 글을 쓰곤 했다는 것이다. 에밀 졸라는 그의 이런 일화에 대해 '소설 노동자의 일생'이라고 평했다. 재미있는 것은 발자크의 방대한 작품들이 돈을 위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한때 사업을 하며 졌던 막대한 금액의 부채와 파리의 사교계 생활을 드나들던 부르주아의 생활이 발자크로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쓰고자 한다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닌만큼 발자크에게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를 글로 엮어내는 천재적 능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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