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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달과 6펜스>가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씌여진 소설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가 증권 중개인이었다가 화가가 되었다는 것과, 물질 문명에 염증을 느낀 그가 가족을 버리고 남태평양의 타이티로 가서 광적으로 그림을 그려대다가 가난과 병에 허덕이며 죽어갔다는 큰 줄기 외의 구체적인 모습은 고갱의 삶과는 많이 다르다. 서머셋 몸은 스트릭랜드의 비상식적인 모습을 '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천재의 그것으로 부각시키고자, 피도 눈물도 감정도 양심도 없는 인물로 재창조해 내었다.
프랑스인인 고갱과 다르게 찰스 스트릭랜드는 영국인이었다(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이름이 전혀 예술적으로 들리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다). 스트릭랜드는 마흔 즈음의 어느날 갑자기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가족으로 부터 증발했다. 아내와 주변인들은 스트릭랜드가 여자와 줄행랑을 쳤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예상과 달리 화가가 되기 위해 안락한 삶과 가족을 헌식짝 버리듯 던져 버린 것인데,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조차 그간 그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에 반해 고갱은 이십대 후반부터 줄곧 화실을 다녔고,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면서도 살롱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아마추어 화가로서 활동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삼십 오세 무렵에 증권거래소를 그만둔 고갱은 전문적인 화가가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는 고갱도 스트릭랜드도 상업적인 면에서 성공하지 못한다.
한편 스트릭랜드와 고갱이 말년을 보낸 타이티는 스트릭랜드에게는 낙원과 같은 곳으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원시적인 낭만 속에서 그림에 전념한다. 그 시기는 스트릭랜드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몇년 간으로 소설 속 화자에 의해 추측되며, 병고에 시달리며 죽음에 이르던 때조차도 천재 화가 스트릭랜드에게는 축복였던 것으로 그려진다. 스트릭랜드는 죽음을 앞두고 장님이 된 후에도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열망을 전부 쏟아낸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와는 달리 타이티에서도 역시 가난과 빈곤, 고독을 못견뎌 하던 고갱은 1893년 가족이 있는 프랑스로 돌아가 타이티에서 완성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연다. 그러나 전시회는 실패하고, 타이티에서 영주할 생각으로 머물던 고갱은 문둥병으로 살이 썪어가는 중에도 그림을 그리며 열정을 쏟아내던 스트릭랜드와 달리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후 고갱은 매독과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5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그 누구의 평이나 인정을 원하지 않은 것과 달리(그는 자신이 죽기전 집의 천장과 벽에 완성한 대작을 태워버릴 것을 유언한다) 고갱은 생애동안 화가로서 인정받기를 바랬다. 제목인 달과 6펜스는 정신의 열망과 현실의 삶을 의미한다. 또 정신적인 열망은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현실의 삶은 돈과 물질의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스트릭랜드가 모든 세속적인 욕망과 물질에 대해 비인간적일 만큼 초연했다면, 고갱은 좀더 인간적인 고뇌에 시달렸다.
서머셋 몸은 예술가로서의 열망은 세속적인 삶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몸은 소설 속 나래이터의 입을 빌려 이렇게 고백한다. 작가란 글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7쪽) 그러나 예술가도 사람이고 보면 영혼과 관능과 열정만으로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은 고갱도 서머셋 몸 그자신도 살아내지 못한 불가능의 삶을 스트릭랜드를 통해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범인인 내가 보기에 스트릭랜드는 비정상적인 예술충동에 사로잡힌 기인이지만, 예술가로서의 그는 서머셋 몸이 다다르고 싶었던 경지가 아니었을까. 사사로운 정이나, 또는 인간적 욕망과 인습과 규약 따위로 얽어맬 수 없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스트릭랜드를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갱이 죽기 약 6년 전에 완성한 <우리는 어디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스트릭랜드가 문둥병에 걸린후 죽기 전까지 집안 천장과 벽에 그린 그림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색채는 좀더 진하고 화려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