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와 나약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메리는 사랑이 무엇이지 모르고 자랐다. 가난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메리의 어머니는 메리의 오빠와 언니가 이질로 죽고나자 오히려 입을 덜었다는 안도를 느낄 지경이었으니, 이 가정에 사랑이 있었을리가 만무했다. 그랬으므로 메리는 취직을 해 독립한 후, 부모나 형제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독신 여성으로 부족함 없이 지내며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자유도 잠시, 시간이 흐르면서 메리는 노처녀가 되고, 독신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절이였던 만큼 타인들의 시선에 떠밀려 사랑없는 결혼을 한다.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었기에, 남 얘기 하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녀가 결혼을 해야만 된다고 말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마구 휘청거렸던 것이다.(73쪽)

 

결혼 후, 메리는 여러사람들의 곱지않은 시선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이제야 말로 진정한 독립을 했고, 지금부터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사랑없는 결혼생활이 행복할리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니던가.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가는 경제적 빈곤과 남편 리처드의 무신경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메리는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킨다. 그러던 중 그녀는 흑인 하인인 모세로 부터 죽음을 당한다. 책은 메리의 죽음으로 부터 시작되면서 과거를 거슬러 기억하며 그녀가 살해되기 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농장의 새로운 관리인으로 이제 막 부임한 토니의 시선으로 보는 메리의 죽음은 기이하기만 하다. 살인범은 애초부터 메리의 하인이였던 모세로 밝혀졌다. 그러나 모세는 살인 후, 달아날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달아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이 범인임을 스스로 자백한다. 그에게서는 마치 죽여할 사람을 죽였다는 듯한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또한 메리의 죽음을 처리하는 백인 경찰관과 이웃 찰리의 태도 역시 몹시 기묘했다. 그들 역시 죽어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듯 메리의 시신을 보며 경멸의 표정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 평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토니로서는 모세와 백인경관, 그리고 찰리의 태도에 대해 몹시 의아했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로 한다. 토니는 은연중에 흑인에 대한 백인의 권위를 잃어버린 메리를 증오하는 동료 백인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백인 문명. 특히 백인 여자가, 경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걸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백인 문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그러한 관계를 인정해 주면, 백인 문명은 붕괴되어 그 무엇으로도 구제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 문명은 터너 부부의 경우와 같은 비참한 실패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41쪽)

 

백인이지만 가난한 농장주였던 리처드는 이웃과 어울리는 일에 소홀했다. 이웃들은 리처드와 메리가 거만하기 때문에 사교적이지 않다라고 여긴다. 또한 리처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담배농사 대신 나무를 심는 등 땅에 대해 애착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리처드에게 담배농사는 농사라기 보다는 담배를 생산해 내는 공장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리처드의 이웃 대농 찰리는 이런 리처드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리처드가 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리처드의 농장을 낚아챌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날 불현듯 리처드의 집을 방문한 찰리는 리처드 부부가 흑인 하인 모세로 부터 주인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분개한다. 그는 리처드의 파산을 기다려 농장을 거저 먹는대신 리처드에게 정당한 값을 쳐주고 농장을 매매할 것을 제안한다. 리처드가 망하길 기다리던 것과는 사뭇 다른 찰리의 이런 행동은 어찌되었든 백인 동족이 흑인보다 못한 처지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리처드의 몰락은 백인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여지가 되는 일이었으므로, 그런일은 일어나서는 안되었다. 찰리나 백인경관이 메리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경멸을 감추지 않았던 것은 그와같은 이유였다. 흑인 하인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백인이라니, 그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것이다. 차별은 인종간에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같은 종이면서 뒤쳐지는 동료는 종 전체에 위해가 된다. 작가는 바로 이점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추측한다.

 

너희는 동료 백인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깜둥이들이 자신이나 너희가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306쪽)

 

그러나 책의 말미로 갈수록 모세가 메리를 죽인 이유가 모호했다. 모세는 복수라고 했지만, 자신들의 땅을 침략하고 자신들을 하인으로 삼은 백인 전체에 대한 흑인으로서의 복수인지, 메리라는 까탈스러운 주인에 대한 하인의 울분인지, 그도 아니라면 백인 여자 메리를 여자로 여겼던 건장한 흑인 남자가 새로운 젊은 백인인 토니의 출현으로 순간적인 분노를 표출한 것인지 분명히 알아채기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리의 육체적인 죽음은 흑인 하인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그녀의 파멸은 그녀가 자라난 환경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생활방식, 가치관 등, 예를들자면 타인의 시선에 밀린 원치않는 결혼 따위로 인해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도리스 레싱의 출세작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자란 레싱의  이 소설은 '사랑과 증오에 대한 비극인 동시에 결코 이어질 수 없는 인종 간의 갈등에 대한 연구' 라는 평을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인종간의 갈등보다는 백인들의 오만함에 방점을 두고 읽었다.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있는 남의 땅에 들어가 땅을 차지하고, 오히려 땅 주인들을 하인으로 삼으며 끝임없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그 노력이 어이없다는 말 말고 다른 어떤말로 표현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