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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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와 <휴먼 스테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 등장했던 은둔 작가 '네이선 주커먼'이 또다시 등장한다. 출판사는 <유령 퇴장>을 주커먼 시리즈의 완결판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작가가 이 작품을 쓴 것은 2007년으로, 그때 나이 75세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출판사의 이런 소개는 그다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2007년 이후로 주커먼 시리즈가 나온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일테니. 또한 작가는 책의 제목을 <유령 퇴장>이라고 정함으로써 네이선의 퇴장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넌지시 생각해 본다.

앞의 세 작품에서 네이선은 화자의 역할로,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증언하고 추리했다면, <유령 퇴장>에서는 그 자신이 육체적, 정신적 노화를 되돌리고자 하면서 곤경에 빠지는 주인공 노작가로 등장한다.

 

유명 작가인 네이선 주커먼은 전립선 암 진단을 받으면서 도시를 떠나 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한다. 그는 비포장의 시골 오두막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문명이나 문화로부터도 거리를 두며, 완벽하게 자신에게 집중하고 글을 쓰는 일 외에는 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망가진 전립선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줄 의술에 기대를 걸고 십일 년만에 뉴욕을 방문한다. 뉴욕은 주커먼에게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긴장감을 되돌려 줄 마법으로 기대되지만, 주커먼은 뉴욕에서 일주일 남짓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언가를 탐하거나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세속적인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안정을 취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글쓰기를 지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그러니까 그 일주일 남짓의 시간을 겪으며, 그 자신이 세속으로 대표되는 뉴욕으로부터 완전히 퇴장할 것을 결심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인 것인데, 그것은 작가가 죽음을 기대하고 세상으로 부터도 소멸될 것을 준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주커먼 시리즈의 네 작품이 아니더라도 필립 로스는 작품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고뇌와 함께 '성'으로 상징되는 젊음에 관해 다루기를 즐긴다(적어도 지금껏 내가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들은 그랬다). 일흔이 넘은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나이에 절반밖에 되지 않는 여인과의 일탈을 벌이거나 혹은 상상하는 식인데, 여자인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자 주인공의 감정상태에 이입하기 보다는 상대 여자의 입장이 무척 궁금하다.

<휴먼 스테인>의 주인공 콜먼 실크의 나이에 절반밖에 되지 않는 애인이였던 포니아 팔리아는 일흔 한 살의 콜먼 실크에게 주체할 수 없는 성적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일흔 한 살의 사람을 남자로 여길 수 있을지 그것이 도대체 상상이 되질 않는다. 역시 <유령 퇴장>에서 노작가 네이선은 마흔살이나 어린 제이미에게 매혹되지만, 제이미가 네이선에게 느낀 것은 매혹과는 관계없는 대작가에 대한 경외심 뿐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역시 여기서도 제목 <유령 퇴장>에 대한 의미를 읽을 수 있었는데, 네이선은 자신에 대한 제이미의 감정에서 '매혹'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제이미에게로 부터 '퇴장'을 결심하는 것이다. 그편이 대작가로서의 명성에 흠집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현명함이었다고 나는 감히 상상한다.

어쨌든 필립 로스가 이처럼 나이든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에 집중하는 것은 그 자신의 노화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부활에 대한 천박하고 어리석은 환상에서 벗어나 코앞에 있는 차고에서 내 차를 꺼내 북쪽으로, 감상적인 꿈 따위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 소설의 변신 요구 속에서 내 생각을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집으로 죽어라 달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내가 갖지 못한 것, 내 삶에 없었던 것, 이제 일흔 한 살이고, 그거면 끝난 이야기 아닌가. 허영심으로 주제넘게 나서던 시절은 끝났다. 뭔가 달리 생각해보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61쪽

어쩌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늙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자각, 더 이상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이라는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이 아닐까.

젊음은 두려움을 모른다. 젊은 그에게 나이듬은 현실이 아니고, 죽음 또한 자신의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어서의 무모한 순간은 거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데도 무모한 짓을 서슴지 않는 경우라면, 그것은 더 이상 젊지 않기 때문에 벌일수 있는 일종의 모험으로 '아직은... ' 이라는 몸부림인 것이다. 네이선은 안정과 평화로움 속에서 일종의 모험을 기획해 보지만, 결국 평안을 선택하기로 한다. 나이를 자각하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바에야 아무일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직은 크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젊은 나이라기보다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내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어기제 같은 것을 품을 줄 아는 영악한 즈음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어떤 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그 일로 인해 내가 느끼게 될 마음의 긴장과 재미,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배우게 될 것들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젊고 전투적이다. 그러나 이런 나도 네이선처럼 나이듬을 스스로 인정하는 날이 오겠지. 그 날의 나자신을 애써서 외면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는 자연스럽게 늙을 것이고, 그 자연스러움을 부끄러워하지는 않겠다.

 

스물 몇 살에 이 책을 읽었다면 좀 지루했을 것 같다. 노작가 네이선의 읊조림이 불필요하게 여겨진 나머지 책 전체가 피곤했을 것만 같다. 인생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여겨지는 지금도 이 책을 읽기에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생에 대한 넉넉한 관조가 필요한 책이다. 그렇지만 그 어느때보다 '기저귀를 찬 남자'인 네이선이 좋아진다. 그를 남자로서가 아니라 늙어가는 인간으로서, 언젠가는 져버릴 목숨을 가진 생명체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집중하길 멈추지 않는 지적인 존재로서 무한 애정을 품는다.

 

그리고 마음에 든 구절,

 

만약 내게 스탈린의 권력 같은 게 있다면, 나는 그 권력을 창의적인 작가들을 침묵시키는 데 낭비하지 않을 겁니다. 창의적인 작가들에 대해 기사를 써대는 자들을 침묵시키는 데 사용할 겁니다. 신문이나 잡지, 학술지 등에서 이뤄지는 문학에 대한 모든 공개적 논의를 금지할 겁니다.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전문대학, 종합대학에서 문학을 교육하는 걸 금지할 겁니다. 독서모임과 인터넷 독서토론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서점에서 판매원이 손님에게 책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도 금지하고, 손님끼리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단속할 겁니다. 나는 독자들이 홀로 책들 사이에 남아 자기 힘으로 책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게 할 겁니다. -243쪽

책을 읽고, 리뷰쓰기를 즐기는 나로서는 독서 토론이나 감상 말하기를 금지해야 한다는 이런 극단적인 주장에 찬동할 이유가 없지만, 나는 마음으로 이 말을 깊이 느낀다. 그러므로 그 모든 해설, 그 모든 감상은 허구다. 책은 오로지 작가와 나만이 주고받는 은밀한 소통이며, 공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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