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학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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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인 네흘류도프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 헨리 조지의 사상에 빠져 토지의 사유는 죄악이라고 여겨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은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소유로부터 자유롭기를 희망하는 청년이였다. 그러나 그후 군대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진보적 자유사상은 옅어지고, 점차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안락과 쾌락을 쫓아 생활하게 되면서 많은 돈을 필요로 했고, 어머니가 보내주는 돈이 농민들을 착취해서 얻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그와 동시에 순수함를 사랑하던 본성도 옅어져 첫사랑의 이미지로 곱게 남겨두었던 하녀 카튜샤를 범하고, 버리게 된다. 그후 카튜샤는 임신한 상태로 네흘류도프의 고모네 집에서 쫓겨나고, 이곳저곳에서 하녀 생활을 전전하다가 윤락녀로 전락한다.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은 기구하게도 법정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카튜샤는 살해범으로,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타락한 카튜샤를 한 눈에 알아보고, 자신이 그녀를 농락하고 버린 과거가 알려질 까봐 전전긍긍하게 되는데, 그러한 불안은 점차로 죄책감으로 번져가고 죄책감은 네흘류도프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카튜샤를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한다. 

한편 카튜샤는 윤락녀로서의 삶에 잠식당한 채 큰불만없이  생활하던 중 느닺없는 사건에 말려들고, 그녀는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는다. 그런 와중에 만난 네흘류도프를 그녀는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고, 이후에도 감옥으로 찾아와 용서를 구하는 네흘류도프를 믿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고, 십년 전처럼 네흘류도프에게 점차로 의지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를 다시는 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녀만 원한다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밝히고, 실제로 어머니와 고모로 부터 물려받은 땅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하거나 싼 값에 대여하고 카튜샤의 시베리아 유형길에 따라나선다.

이처럼 드러나보이는 큰 줄거리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귀공자 네흘류도프와 하녀 카튜샤의 사랑이야기이다. 처음 <부활>을 읽었을 당시만해도 나 역시도 네흘류도프의 카튜샤에 대한 희생적 사랑과 불행한 삶으로 부터 구원받는 카튜샤의 이야기로 이해했던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그당시의 귀족청년이 쉽게 저지르곤 했던 실수를 실수로 치부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겠다며 살인범이 된 카튜샤를 따라가고 원한다면 결혼도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귀공자라니, 영 억지스럽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토록 진부한 사랑이야기라니. 아무리 150년도 더 된 사랑 이야기라지만 말이다. 아니, 150년 전 귀족청년과 하녀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말이 안된다고 여겼다. 때문에 카튜샤가 의심하듯 네흘류도프의 희생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의 천국행을 위해 또다시 카튜샤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나 역시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활>을 좀 다르게 읽었다. <부활>은 사랑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되, 러브 스토리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에 관한 이야기이며, 율법에 잠식당한 신과 선에 관한 이야기이고, 부조리한 사회의 계급구조에 대한 고발이며,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살야 하는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인생 강좌인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가 감금되어 있는 감옥에 드나들면서,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뇌한다. 어떤 인간은 어떻게 다른 인간들을 판단하고 벌을 줄 수가 있으며, 때로는 목숨을 빼앗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어떤 인간들은 어떻게 다른 인간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감금하며 때로는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 또한 그러한 일에 대해 그 누구도 죄책감이 없으며, 오히려 꼭 해야만 하는 숭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는지, 귀족이라는 무위 속의 인간들은 무슨 권리로 땅을 차지하고, 농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온갖 사치를 누리며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이런 제도를 만들어낸 사람들, 그리고 이 규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러한 무서운 상태, 인간 감정에 대한 이와같은 조롱에 대해서 아무도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데 대해 그는 매우 놀랐다. 호위병도, 소장도, 면회인도, 죄수와 모두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양 인정하고 또 이행하고 있었다. -1권, 236쪽

그야말로 네흘류도프의 정신적 부활이라 할 수 있는데, 한 때 그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추종했던 순수한 영혼의 청년이었으나, 이후에는 온갖 향락에 그 자신도 도취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각성을 '부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카튜샤가 윤락녀가 되고, 종래에는 범죄자가 된 근원에 네흘류도프 자신이 있었음을 자각하고, 이제까지 자신이 누려온 모든 기득권이 민중의 희생을 딛고서야 가능했다는 뉘우침을 카튜샤를 통해 새로이 일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의, 선, 법률, 신에 관한 모든 행위와 말들이 기존질서를 위한 요설에 지나지 않으며, 야비하고 탐욕스러우며 잔인성마저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네흘류도프의 정신적 부활을 통해 독자들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부활>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예순 한 살 때로,  인생의 온갖 경험을 다지나친 톨스토이의 인생관이 오롯이 담긴 작품이 <부활>인 것이다. 그는 도덕주의자로 불리운 만큼, 노년에는 19세기 러시아 문명의 암흑과 비인도주의적인 사회상에 대한 고발에 두려움 없이 덤벼들 수가 있었다. 따라서 톨스토이의 기독교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인 세계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부활>며, 그의 이런 사상은 네흘류도프의 정신적인 부활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2권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에 진리가 있다라고 주장해 미치광이로 취급받는 노인이 사실은 현자라는 암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들이 갈고닦은 특수한 지식의 권위를 지켜내기 위해,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첨가해, 인간 사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영특한 무리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직업적 속임수가 문외한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기고, 당대의 문명사회를 자기들의 방식대로 운영하던, 사이비 지성의 독재 체재가 존재했다. 오늘날 우리 문명사회를 운영하는 이들은 바로 법률가들이다.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21쪽

미국의 법학자이며, 형식주의 법학의 추상성과 폐쇄성을 비판하고, 쉬운 법문장 운동을 이끌고 있는 프레드 로델은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서 법률가와 법원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옹호하기 위한 고도의 사기집단이며, 때문에 법관과 법원을 없애고 모든 이가 실생활에 필요한 법을 쉽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법률 용어와 법 절차가 단순화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프레드 로델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읽은 톨스토이의 <부활>에서는 무엇보다 19세기 러시아의 재판 절차와 법률가들의 모습에 주목했는데, 세상의 질서를 위한 종교와 법률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행해지는 온갖 부정과 죄악이 계급적 옹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무엇보다 잘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일어난 일로만 치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프레드 로델은 이러한 부조리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야기가 아닌 <부활>은 때때로 좀 지루하다.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네흘류도프의 자각이나 다짐이 자못 설교조여서 종종 지루해지곤 했다. 아마도 이래서 톨스토이는 '도덕주의자'라고 불렸을 것이다.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옳은 일에 대한 권고는 여전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활>은 읽혀져야만 하는 필독서임에는 틀림없다. 무엇보다 세상의 이치라고 알려진 기존의 질서에 순화되어가는 무력하고 나태한 내 정신의 부활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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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3-23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활은 제 인생의 한권의 책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