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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그린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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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카운티지. 그래서 거기가 어딘지 아는 사람조차 없어.

그래. 그럼 블랙스완그린은 검은 백조로 유명한 거야. 초록 백조로 유명한 거야?

아냐. 흰 백조도 없어.

블랙스완그린에 백조가 없다고?

그래. 그냥 마을의 우스갯소리 비슷한 거야. -327쪽

어느 지방 소도시라도 그러기쉽지만 블랙스완그린 역시 폐쇄적이고 완고하며, 보수적인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들은 외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고, 장미전쟁 때부터 블랙스완그린에서 살아오던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외부인으로 여기는 그런 곳이다. 외부인이라는 것은 '우리'라고 불리우는 것과는 '다르다'는 의미인데, 외부와의 경계를 지음으로써 블랙스완그린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통을 중요시하는 어른들과 달리 젊은애들은 어서 빨리 독립해 답답한 작은마을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전통을 중요시하는 어른들조차 젊었을 때는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러다 블랙스완그린을 떠나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블랙스완그린을 둥지로 여기며 어른이되고 짐짓 블랙스완그린만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중늙은이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작은마을 블랙스완그린을 영국 전체로 확대 해석해 볼 수도 있는데, 소설의 배경이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전쟁을 벌였던 1982년으로, 본시 아르헨티나의 영토였던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영국인들인 자신들을 선민으로, 뒤늦게 포클랜드를 되찾고자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압제자의 지배로부터 구원받아야만 하는 후진국민들 쯤으로 여긴다. 아르헨티나민들의 입장에서는 영국군인들이야 말로 압제자이며 날강도 심보를 가진 외부인들인데 말이다. 여기서 애국심이 조장되고, 전쟁은 3차대전으로 확대될 여지를 품은채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죄없는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 역시 외부와의 경계짓기를 통해 내부를 돈독히 하자는 수작으로 볼 수 있겠는데, 무릇 이 시기는 영국의 대처수상이 사회복지를 축소하고, 국영기업을 줄여가던 바로 그 시기였으니 말이다.

또한 소년들은 패거리를 짓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왕따인 것이다.

외부와의 경계짓기. 소년이거나 어른이거나 다름없이 어딘가에 포함된 '내'가 되기는 목숨을 걸고 덤벼들만큼 중요한 일이다.

 

패거리 만들기가 잘되려면 피가 필요한 법이다. -388

블랙스완그린에 11년째 살고있는 제이슨 테일러는 열세살로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다. 사춘기란 자신이 남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감과 동시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우리나라 소년들 사이에선 삼선 슬리퍼나 노스페이스 등으로 자신이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표현하곤 하지않던가).

제이슨 역시 자신이 다른 누구와도 다른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면서, 자신의 다름을 비극으로 여기며 극도로 회피하고 애써 감추려 한다. 이런 노력은 결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과 함께 또래들에게 떠받들여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 제이슨에게는 고질병이 하나 있는데, '행맨'으로 표현되는 그것은 말더듬이증이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소망의 결과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눈에 띄고 싶다는 욕망의 결과일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제이슨은 간혹 말을 더듬곤 한다. 말더듬이증만 제외한다면 제이슨은 아주 평범한 소년으로 공부도 상급반 수준이며 운동신경도 그리 둔하지 않다. 때문에 또래의 말썽꾸러기들로 부터 낙오되지 않기는 매우 손쉬워 보이지만, 말을 더듬는 제이슨에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한편, 제이슨에게는 사물을 보고 흘리지않는 관찰력, 또는 깊은 사고력 따위가 있었는데, 거기에 단어들을 아름답게 조합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어 종종 시를 쓰곤 한다. 그러나 작은 시골마을의 열세살 소년에게 시적 감수성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수치로, 마을의 말썽꾸러기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제이슨은 그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축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즉, 소설 <블랙스완그린>은 열세살 소년 제이슨이 또래들에게 받아들여지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장 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성장소설로만 이해한다면 <블랙스완그린>은 다소 지루하고 재미없다. 실제로 초입에는 너무나 많은 소년들이 등장해서 누가 누구인지, 이애가 말썽꾸러기인 것인지, 아니면 바보인 것인지 알기 힘들었다. 거기에 화자가 소년 시인인 만큼 묘사와 은유가 넘쳐 다소 산만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자 은유와 생략이 많은 제이슨의 이야기에 깊이 빠질 수 있었고, 종종 시인다운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가을은 곰팡내가 나고, 열매들은 어쩐지 지저분해 보이고, 나뭇잎들은 녹슨 것처럼 적갈색으로 변하고, 멀리 날아가는 철새들은 V자 대형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저녁은 연기가 자욱하고, 밤은 싸늘하다. 가을이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가을이 아픈 줄도 미처 몰랐다. -416쪽

아픈만큼 성숙해지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 제이슨은 또래들과의 갈등과 부모님간의 불화 사이에서 점점 짓눌려가지만 바로 그 슬픔때문에 점점 더 내면이 충만해져만 간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른들은 사람은 여든까지 살고, 청소년기의 광란은 고작해야 사년이면 사그라드는 것이니 견디라고 하거나, 주모자의 힘줄을 끊어놓으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충고 밖에 하질 않는다. 견디거나 한명만 죽도록 패주거나 어찌되었든 스스로 이겨내라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나중에 일이 벌어지고 나면, 왜 말 하질 않았느냐고 아이를 질타하는 것은 무책임한 어른들의 특기인 걸까.

 

'다른'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신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차별하는 모든 심리가 바로 이러 할 것인데, 결국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인상을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위로받고 싶은 것일테지만, 그 무엇보다 천박한 것은 바로 그것으로 내 존재의 증명을 위해 누군가를 차별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사춘기 시인 제이슨의 눈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던 것이다.

제이슨이 성장기에 겪은 고통을 이겨내거나 그렇지못하거나 어떻든 삶은 계속될 것이고, 삶이 계속되는 동안 차별하거나 차별받는 일들 역시 계속될 것이다. 한 번은 즐겁게, 또 한 번은 서럽게...

 

<블랙스완그린>에서 아주 매혹적인 인물을 만났는데, 최근에 읽은 소설 중 가장 내 마음을 끌었던 인물이다. 벨기에인인 에바 크롬린크 부인이 바로 그러한데, 그녀는 기품있는 노부인으로 제이슨이 야만인과 같은 사춘기 소년의 무리 속에서 자신의 독특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 아름다움의 추상성에 관해 제이슨에게 가르치며, 제이슨이 시인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인생에 몇 안되는 귀중한 스승을 만나는 행운을 잡은 제이슨은 안타깝게도 막 그녀에게 손을 내밀려는 찰라, 그녀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좀 더 오래 제이슨과 함께 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때문에 내 마음이 다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 삶 속에 그녀와 같은 존재가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니, 나 역시 그런기회를 놓쳤던 기억으로 마음이 아리다.

옮긴이의 글을 보니, 에바 크롬린크는 데이비드 미첼의 전작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등장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아, 에바 크롬린크를 따라 <클라우드 아틀라스>로 건너가야 할까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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