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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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근본주의根本主義 또는 原理主義는 종교의 교리에 충실하려는 운동이다. 경전의 내용에 대한 절대적 준수를 지향한다. 종교의 근본주의는 정치권력과 불화를 일으키는데, 근본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퍼지고 있다. (위키백과)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내가 늘 분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네 나라가 다른 나라 일에 계속 관여하는 건 참을 수 없었어요. 베트남, 한국, 타이완 해협, 중동, 그리고 이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말이죠. 미국은 우리 아시아 대륙을 둘러싼 갈등 대부분과 교착 상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게다가 나는 파키스탄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미 제국이 힘을 행사하는 주된 수단이 재정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원조와 제재를 번갈아 하면서 말이죠. 그런 지배의 과업을 돕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건 옳은 일이었어요. 놀라운 게 하나 있다면, 내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거였어요."(본문 138쪽)

 

월요일 아침, 펼쳐든 신문에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테러 공격을 받는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 쌍둥이 건물중 오른쪽은 검은 연기가 끝도 없이 피어 오르고, 왼쪽의 건물은 이제 막 폭발하며 사방으로 무시무시한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이미 여러번 반복적으로 보았기때문에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장면이었음에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듯 했던 11년 전과 똑같은 몽롱함으로 사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주변의 다른 건물들중 한채를 더 이고있는 것처럼 높은 위용을 자랑하는 세계무역센터의 폭발 장면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현실감이 없다. 그것은 미국의 위용이고, 절대 무너져서는 안되는 좋은편의 상징이었다.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사진 아래로 씌여진 글을 정신없이 읽었다. 세기의 사건, 세기의 슬픔으로 읽히는 그날의 사건에 남몰래 미소지은 이가 있다는 사실, 아니 사실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위의 글은 소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주인공 찬게즈의 말이니까. 그러나 정말 누군가는 살짝 입꼬리가 말릴 정도의 통쾌함을 속으로 삭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미국은 현재 세계 초강대국이며, 따라서 자국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남의 나라의 아픔이나 슬픔쯤은 없는 일처럼 감출수도 혹은 앞뒤 맥락을 잘라버릴 수도 있는 힘을 가졌으니까. 그런 강대국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무모함은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 교리에 충실하려는 근본주의는 종종 테러리즘, 혹은 테러리스트로 잘못 읽혀지곤 한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를 좋은편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과 비슷한 인지적 오류이다. 또한 그것은 자신은 미국인이 아니면서도 미국인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혹은 이고싶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찬게즈는 뼈속까지 미국인일수 없다는 사실을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앞에서 확인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1세는 전쟁포로들이나 발칸 지방의 기독교 소년들을 강제 징집한 후 이들에게 이슬람과 투르크의 전통을 익히게하고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전쟁에서 자신들의 출신 기독교국들을 무너뜨리는데 앞장서게 했다. 이들이 바로 술탄의 정예부대였으며 매우 용맹했다고 알려진 '예니체리'다.

찬게즈는 프린스턴에서 유능한 인재로 키워졌으며, 이후 감정 회사에 취직해 의뢰사의 이익을 위해 합병하고 구조조정하는 일을 하게 된다. 9.11테러 이후 파키스탄이 전쟁의 위기에 놓이게 되면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갈등하던 찬게즈는 칠레의 출판사를 조정하는 일에 참가했다가 자신이 다름아닌 현대판 예니체리로써 능력이 키워졌고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로서 찬게즈는 미국인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파키스탄으로 돌아가 흔히 말하는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근본주의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를 근본주의자로 만든 것은 미국이 아닌가. 근본주의자로 불리우는 찬게즈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미국인에게 이 모든 고백을 하는 것이 이 책의 전체 내용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고 기다릴 수 없을만큼 당장 책을 읽고싶었다. 나 역시 찬게즈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늘 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남몰래 미소를 흘렸다는 찬게즈의 이야기를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었다.

이 책을 옮긴 왕은철은 문학은 때로 듣고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룰 용기가 필요하며, 그러한 용기가 일방적인 자기주장이나 선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이 소설을 그러한 역할을 매우 잘 하고 있으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우아하고 오싹하다 라고 말한다. 나는 옮긴이의 이 한마디가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잘 함축하고 있다고 동의한다.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 책의 표지가 표절되었다는 주장을 접하게 된 것인데, 내가 발견한 최초의 주장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블로그(보슬비님 블로그)에서 였다. 확인해 보니 스콧 웨스터펠드의 <피프>와 이 책의 표지가 일러스트의 크기와 색감의 차이 외에는 같았다. 즉 보슬비님의 표절 주장은 사실인 것으로 보여진다. 좋은 책이 이와 같은 일로 묻혀버릴까 매우 안타깝다. 이점에 대해 출판사측의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며, 사후 대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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