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읽는 시간 - 오래 시선이 머무는 66편의 시
권혁웅 엮음 / 문예중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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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초대형 태풍이 몰려 올 것이라고 뉴스 특보가 쏟아지던 새벽이였다. 목이 말랐던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의 욕구가 있었던 것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불현듯 자다깬 그 새벽, 거실 창을 통해 바라본 하늘이 유난히도 밝고 푸르렀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도시하늘에서 그토록 많은 별을 본 것이 처음있는 일이였다. 태풍이 오려고 이다지도 하늘이 맑은 것인가 감탄하다가, 잠든 아이에게 보여주고싶은 생각에 휴대폰을 들었지만, 아무리해도 내가 보는 것처럼 맑은 하늘과 별이 사진에 박히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 보는 것이 아까워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다.

"자기야, 별 좀 봐." 천둥처럼 코를 골고 자던 남편은 부스스 일어나 열린 베란다 창으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툭 내뱉는 한마디.

"너, 장난할래!!!"

헉, 어렸던 날 마당에서 오줌을 누다 은하수를 보기도 했다던 남편은, 내가 느끼는 감동의 물결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쏟아지는 별이란 그런것이 아니라며, 그래도 많긴 많다고 한마디 더하고 들어가는 남편이 그처럼 야속하기도 참 오랫만이였다. 그러나 어쨌든 바람이 소소히 부는 새벽, 나는 분명 쏟아지는 별을 보았다. 그리고 그 푸른밤 파랗게 빛나던 별들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것은 은하수보다 더 푸르게 빛나는 별들의 무더기였다고.

 

 

시가 내게로 오는 요즘이다. 꼭 가을이기에 시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작년 가을에도, 재작년 가을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시어들으 읽는 다는 것은 사실 지겨움이였으니까. 때문에 어느 계절, 어느 때에 특별히 시가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는 누군가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새벽, 남편은 느끼지 못한 별무더기를 나 혼자서만 느꼈듯이 시를 느끼는 것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나 혼자서만 느껴야 하는 '완전한 고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은 <당신을 읽는 시간>이다. 시인이 풀어놓은 물감과 같은 시어들이 내 가슴을 지나 내 전체를 물들이고, 그 속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나'를 오롯이 느끼는 시간. 바로 시를 읽는 시간이다.

 

 

스타킹을 신는 동안/최정례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본처들은 급습해

첩의 머리끄뎅이를 끌고 간다

상투적 수법이다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

퇴근해 돌아오는 사람을

집 앞 계단을 세 칸 남겨놓고 갑자기 심장을 멈추게 해 끌고 가버린다

오빠가 그렇게 죽었다

전화를 받고 허둥대다가

스타킹을 신는 그동안만이라도 시간을 유예하자고

고작 그걸 아이디어라고

스타킹 위에 또 스타킹을 신고

끌려가고 있었다

 

같은 시를 읽어도 느낌은 서로가 모두 다르다. 작가 권혁웅이 내놓은 해설은 이렇다. '어떤 고통 앞에서는 더듬는 일밖에 못한다고, 그러니 고작 이런걸 해설이라고 내놓는다고.'

느닷없이 닥친 오빠의 죽음 앞에 시인은 스타킹을 두겹으로 겹쳐신을 만큼 당황한다. 거기에 더해 언제가 느닷없이 닥칠 자신의 죽음 또한 미리 황망해 한다. 해설을 적은 작가 권혁웅은 죽음의 어이없음을 '어쩔수 없는 일'로 치부한다. 그리고 시와 해설을 동시에 읽는 나는 코끝이 붉어온다. 그것은 실제 내 오빠의 불행을 무릎 앞으로 느낀 것처럼, 그리고 연이어 닥칠 나의 불행을 직감하는 것처럼, 슬프다.

아는만큼 느낀다라는 말은 '시'에도 어김이 없다. 여기서는 '아는만큼' 대신 '여는만큼'으로 치환해야 하리라. '나를 여는 만큼 느낀다' 바로 당신을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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