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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하철을 아침 저녁 제법 오래 타고다니는 나로써는 손에 읽을거리가 없는 날은 지하철을 타려면 미리부터 불안하다. 후텁지근하거나 혹은 너무 과한 냉기를 꾸벅꾸벅 졸면서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서 구입했다. 일부러 버스를 타고 서너정류장을 가서 시내 대형서점에 들러 미리부터 점찍어둔 이 책을 고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있는 백화점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간 가량을 정신없이 읽어갔다.
우선 표지그림이 섬뜩하다. 제목인 '화차'와 달리 몹시도 쿨한 은색 세로선들은 냉동된 은갈치토막을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바코드였다. 언젠가 바코드로 지구가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래서 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바코드 선 아래로 한 여자의 얼굴을 발견했을때의 느낌은 분명 공포였다. 바코드에 갇힌 불분명한 여자의 얼굴은 웃고있는 듯해서 더더욱 섬뜩했다.
한 번 손에 들면 놓을 수 없는 책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책이 그랬다. 나는 개인적으로 겁이 많은편이라 스릴을 즐기지 않는다. 영화도 그렇고 놀이기구도 그렇고 책도 그렇다. 공포소설은 물론이고 탐정소설도 즐기지 않는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조심스러운 성격이 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되도록 좋은것만 보고 좋은 것만 알고 싶은 강박에 가까운 본능으로 영화와 책과 놀이기구를 선택한다. 그런데 이 책은 알듯말듯 한 공포속에서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이 책의 공포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지하철에서 내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읽었던 내용을 공포로 각인하고 있었던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들렀던 백화점에서 민소매 블라우스를 할부로 구입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모르는 척 의식밑으로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이 나와는 상관없었으면 싶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나와 상관있는 내용이었다. 화사한 옷과 맛있는 음식, 고급스러운 취향의 기타 용품들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최근들어,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런 행복들은 정말 '행복'과는 상관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가끔씩 백화점에 들러 아름답고 부드러운 옷들을 볼 때마다 갖고싶다는 그래서 내가 입고싶다는 욕망에 부르르 몸을 떨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구입했을때의 느낌은 정말 '행복'과는 다른 떨림임을 알지만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들을 내것으로 만들기에는 사실 너무 쉽다. 카드 한 장이면 말그대로 한껏 기분을 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리고 어디서도 카드 한 장에 무너질 수 있는 내 인생 따위는 가르켜준 적이 없다. 그저 이걸 입으면, 이걸 먹으면, 이걸 갖으면 행복할 것이고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악마의 속삭임만이 넘치는 세상이다.
선택한 적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한 여자. 그 운명으로부터 몹시도 달아나고 싶었던 한 여자는 결국 자신의 이름에서 한 발자국도 달아날 수 없었다. 그저 바코드 뒤에서 희미하게 웃을 뿐이다. 그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어서 더더욱 공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