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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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시절부터 지금껏 주택에 산 기억이 없다. 늘 아파트에 살았다. 살면서 불편한 것도 없었고, 생각해보면 고생을 했던 기억도 없다. 그냥 평범한 중산층이었다. 신도시로 두번 이사를 했다. 한번은 초등학생 때, 또 한번은 대학입학하던 해에..
대학시절 이사했던 신도시에는 아파트 단지와 가까이에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곧 철거될 동네가 있었다. 그곳은 몹씨 너저분했고, 불결했다.
그시절 그기억엔 그랬다. 철조망 쪽으론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곳에 사람이 살 수 있다는게 신기할 뿐이었다.
어느날 철조망 너머 판자촌에 불이났었다. 소방차들이 달려오고 철조망에 아이들이 매달려 불구경을 했던것 같기도 하다. 세세히 기억이 나지않는게 나는 그만큼 철조망 너머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일, 알고싶지 않은 일이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껏 살아왔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들은 나의 이웃이고, 나의 부모이고, 나의 형제이고, 나의 아이들이며,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내가 지금껏 '나'라고 믿어왔던 것은 허울뿐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용산참사 1주기 추모문화제에 다녀왔다.
천막아래 비에 젖은 플라스틱 의자에 눈치껏 쭈볏거리고 앉으려하자 한아주머니가 나를 밀어냈다. "여기 유가족 자린데"  뻘줌했지만 이해해야 했다. 유가족...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다 가장을 잃었다. 어떤 자리이던 빼앗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는 얼굴 하나 없이 어색하게 우산을 펼 수도 없는 비좁은 틈에서 한맺힌 춤사위를 보고, 노래를 듣고, 눈물 섞인 각설이 타령을 들었다. 때때로 그들은 웃었지만, 어울리지 못한 나는 웃을수도 울수도 없었다.
사진을 몇컷 찍고 돌아갈 수도 머무를 수도 없어 주춤거릴 때, 불쑥 한여인이 가슴에서 책을 내민다

<내가 살던 용산>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보았던 책이었다. 용산참사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망루에서 살아나온 용산철거민대책위원장 이충연씨의 편지를 기반으로 그날 망루에서의 상황을 기록한 르뽀만화.
"어 그거 본건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기사를 보았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녀에게는 책을 보았다는 이야기로 들렸나보다. 나만큼이나 주변머리가 없어뵈는 그녀는 쑥스러워하듯 웃으며 책을 다시 가슴에 품는다. 안개비에 싸인 그녀는 지쳐뵈기도 했고, 슬퍼보이기도 했고, 아파보이기도 했고, 수줍어보이기도 했고,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그건 바로 내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주세요. 그 책..."
돌아오는 길, 전철에서 넋을 놓고 읽었다.
49, 51, 54, 58, 72...
테러범이 되기에는 너무 늙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불리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않고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 폭도로 규정되었다. 그들은 폭도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는 경찰특공대가 나설 이유가 없다.
망루가 불타 사망한 철거민 다섯 명에 대해 이례적으로 유가족의 동의도 없이 검찰은 사건 당일 부검을 실시했다.
12월 30일 유가족과 정부는 합의하고 355일 만에 다섯분의 장례식을 치뤘다. 장례식은 끝났지만 폭도로 몰린 철거민의 명예와 사건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이땅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만천하까지는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이땅의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갈 이유를 잃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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