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피아니스트 스티브 바라캇의 내한 공연을 다녀왔다. 한때는 그의 음악을 미치도록 사랑했으므로 공연예약을 해놓고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설레였다. 공연은 설레였던 만큼 만족스럽지 못했다. 연주회에서의 노련함은 자칫 무성의한 태도로 비추기 쉽다는 것을 느끼게 한 공연이었다. 작곡 뿐 아니라 프로듀서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15년이 넘는 경력에 걸맞게 노련했다. 공연장을 꽉 채운 관람객들을 한 손에 휘어잡자면 그정도의 노련미는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당연함이 너무도 거북스러웠다. 2부 공연까지 마치고 커튼콜로 그의 자작곡 ’자장가’가 연주되는 동안 대형 스크린에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기아의 모습들을 비춰주었다. 까맣거나 혹은 누런 아이들은 거미처럼 말라붙은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커다란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인 너무도 아름다운 남자 스티브 바라캇... 그는 진지하고도 능란하게 ’자장가’를 연주했다. 
그가 유니세프 친선대사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는 공연 수익금의 일부분을 유니세프에 기부할 것이다.
그래서 스티브 바라캇의 아름다움이 배가 되었다는 따위의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화가났다. 무엇엔가 기만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라고 확실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의 그 느낌은 그랬다. 구걸하고 있는 까맣고 노란 아이들... 그리고 금발의 천사 스티브....
금발의 천사, 그들이 말하는 ’오지’로 개명내지는 구원의 손길을 뻗기전, 오지의 그들은 정말 무지하고 문명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답지 못한 생활을 해 오던 야만인들이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아 마땅한 구원을 거부할 경우 쓰레기처럼 처리되어도 마땅한 존재였을까. 적어도 그들끼리는 행복했을 것이다. 서구의 문명이 행복의 척도가 되기 이전에는.

’워싱턴 합의’는 미국과 국제금융자본이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개발도상국 발전모델로 삼자고 미 행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의를 말한다.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란 무엇인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야기할 수 밖에 없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던가. 이른바 세계화라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전도에 지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에서는 오직 시장의 자유로운 기능만이 합리적일 뿐이다. 합리적인 자유경쟁체제에서 해택을 받는 것은 이미 기득권을 쥔 소수의 그들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없는 자들을 착취해 있는 자들의 배를 불릴 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내막을 잘 알지 못한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 화려한 자본의 담론에 이끌려 ’시장’과 ’경쟁’을 새로운 희망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열심히 일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이란 새마을운동 적 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경쟁이 이뤄질 수 없는 지점에서 게임을 시작하고 있다는 불합리를 도대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세계 사람들이 먹고 살 수있다는 것을 믿을수 없다. 살인적이고 국가적인 빈곤에서 자력으로 일어나려는 몇몇 나라의 시도를 다국적 기업과 손잡은 쿠테타 세력이 짓밟아 다시 국민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나같은 한사람의 낭만적인 막연한 도움 가지고는 기아가 해결되지 않는다. 원조라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원조라는 것은 총과 빵을 함께, 그리고 주는 이들의 입맛에 맞게 조리된 임시방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식민지는 유효한 것이다. 19세기와 같이 실제적인 국토 찬탈을 통한 식민지화가 아니므로 이를 신식민지화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 지글러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고 했지만, 먹어야 산다는 당면과제 외에 남의 것을 빼앗아 내것을 늘리려는 욕망도 인간만이 갖는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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