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 권지예 소설
권지예 지음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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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똑 같은 책을 10대에 읽거나 20대에 읽거나 30대에 읽거나 그 느낌은 한가지일까. 한 사람이 가지는 정서는 죽을때까지 한결같을 수 없다.
처한 환경에 따라 오늘까지 겪었던 경험치에 따라 지금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 고로 똑같은 책이라도 읽는 시기에 따라 느끼는 정서가 다르다. 마찬가지로 시기에 따라 정서도 다르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정서는 타인의 슬픔에 조금더 공감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할까.
욕망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상태라고 할까.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는 "그럴수도 있겠지"하는 인정에서 시작될 것이다.  바로 그점이 권지예의 <퍼즐>속 인물들을 나와 동일시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되었주었다.

소설 <퍼즐>은 일곱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편집이다.
그러나 그 일곱편의 이야기들은 똑같이 공포와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막연히 꿈꾸고 욕망하고 그리고  혹시라도 꿈이 이뤄져버릴까봐 단편 속 주인공들은 전전긍긍한다.
이뤄지고 난 꿈은 더이상 욕망도 아니고 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뤄져 버린 꿈은 ’끝’이라는 공포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공포인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욕망은 절대 끝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 끝의 모습까지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퍼즐> 속의 인물들은 남편이 있거나 아내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애인도 있다(결혼하지 않은 인물일지라도 이미 결혼한 애인이 있다).
남편이나 아내가 현실이라면 애인은 이루지 못한 언제가는 이루고 싶은 꿈이요 욕망이요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의 공포다. 욕망이 결국 공포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결핍에 의한 끝을 모르는 나락이기 때문이다. 또는 이뤄져서는 안되는 말그대로의 꿈이기 때문이다.
<퍼즐> 속 그들이 꾸는 꿈은 일탈이다. 일탈은 일탈일때 유혹적이다. 일탈이 일상이 되어버렸을 때는 더이상 꿈일 수 없다. 또 한편에서는 궤도를 이탈한 별들이 정상궤도를 꿈꾸기도 한다. 이탈한 별에게는 정상궤도가 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또한 이뤄져서는 안되는 꿈이다. 이루고 나면 일상이라는 괴물밖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비극인 것이다. 불륜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래서가 아닐까. 속된 말로 살다보면 그놈이 그놈이란 얘기.... 일탈도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일상이 되고 나면 남는 것은 공포뿐이다.


책을 읽으며 느꼈떤 일관된 정서는 공포였고 책장을 덮었을 때  ’인간에겐 자신의 입장만 있다’라는 보편적인 진리만이 남았다.
코딱지 만한 내 아픔이 눈덩이 만한 타인의 아픔보다 클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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