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뜻밖의 행운이었다. 이 책을 읽게 된건....
생각지도 못했던 이 뜻밖의 선물인 <어머니를 돌보며>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하려 한다.

책의 겉표지를 보면 파킨슨 병에 걸린 어머니를 7년간 돌보며 써내려간 기록이라고 분명 적혀있음에도 나는 아이러니 하게 ’웰빙’ ’잘먹고 잘살기’가 떠오른다. 이것은 나의 장난기 일까. 아니면 출판사의 깊은 의도일까.

남편의 출장으로 아이와 한침대를 쓰며 아침을 맞았다. 
알람소리를 듣고 눈의 뜬 후 아이와 뒹굴뒹굴 간지럼태우기를 하다가 문득 사흘에 걸쳐 읽고 있는 <어머니를 돌보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책 중간에 치매에 걸려 더이상의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 해진 어머니에게 딸이 점심엔 무엇을 드셨냐고 묻자 어머니가 "찐 가마니 몇개"라고 대답한 장면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같이 키득거렸던 기억이 있기에 말을 꺼내기가 수월했다.
"그 책처럼 엄마도 치매에 걸려 널 못알아보게 되면 어떻게 하지?"(나는 진정으로 물었다. 그런상황이 되면 정말 어쩌지...)
"내가 엄마를 알아보니까 괜찮아"(녀석....... 정말 맘에 드는 아들이다 ㅋㅋㅋ)
"엄마가 계속 너를 괴롭히고 힘들게 해도 괜찮아?"(맘에 드는 답을 해주었기에 한단계 높여 어리광을 부려보았다)
"그럼 죽어라 뭐"(허거덕 나쁜놈)
"엄마 근데 몸만 죽는거지?"(살짝 긴장한다)
"당연하지. 몸만 죽고 영혼은 천국에 가서 널 기다리고 있지. 몸은 죽어도 항상 영혼은 네 안에 살아있을꺼야. 네가 엄마를 생각할때마다 네 옆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을꺼야. 왜냐면 사랑은 옆에 있어주는 거니까. 넌 내 애인이잖아."(괜히 꺼냈나 아침부터 이런얘기)
"그치만 엄마 90살까지는 살면 좋겠다.."(아이가 슬쩍 눈물을 훔친다. 건성으로 듣고 대답하는 줄 알았는데 녀석 제법 심각하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불안이 있다.
겉으로 표출된 불안이 어떤 모습이든 불안을 깨고 안으로 들어갈 수록 불안의 근원은 죽음과 가까워진다.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내 모든 행동, 사고, 말에 영향을 끼친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죽으면 어쩌지. 아이가 죽으면 어쩌지. 남편이 죽으면 어쩌지.......

저자의 어머니는 젊어서 강직하고 자기일을 제대로 해내며 남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자녀들에게 바른길을 일러줄 줄 아는 그런 어머니였다. 또 나름대로 직장에서 자기몫을 훌륭히 해내는 사회인이며, 남편과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아내였다.
그러나 파킨슨병이 찾아오고 걸음걸이가 둔해지고, 지각능력을 상실해 가며, 환각을 보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며 기능하는 인간이였음을 어머니 자신조차도 점차로 잊어가게 된다. 꽤 쓸모있던 한 인간이 노쇄해지고 급기야 어느날은 쓸모없는 물체처럼 바뀌어가는 시간....그래서 겪게 되는 딸의 심정... 그리고 딸이 추측하는 어머니의 심경... 기록이다. 작자는 엄마가 정신이 온전했다면 물리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데 동의하지 않았을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온전치 않아지고 하루종일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거나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으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엄마는 가끔씩 맑은 눈빛으로 말한다. 죽고싶지 않다고.

내가 이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본 어떤 한 친구는 작년에 어머니를 떠나보냈기 때문에 자신은 이런책은 읽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엄마란 소리만 들려도 눈물이 나기에.....
그러나 나는 다 읽고 나면 꼭 빌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의외로 책을 읽으며 담담했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자신의 감정에 빠져 책을 감상적으로만 끌어가지 않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엄마가 혹은 부모가 혹은 다른 내 가족이 죽음으로 나와 이별하는 시간을 갖을때 또 내게도 예외없이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 책은 도움이 될것이다. 

흐릿한 정신, 뻥뚫린 눈으로 저자의 엄마는 말한다. "난 너와 멀어지고 싶지 않아." 
우리가 갖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도 큰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을때도 생각했지만 나는 어느날 갑자기 죽고 싶지 않다. 내 아이에게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않다. 
그렇다고  이별의 시간을 길게 갖고 싶지도 않다. 적당히 그 적당히란 의미를 조금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적당히 이별의 시간을 갖고 싶다. 병든 부모의 죽음은 어떤식으로든 자식에게 죄책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 길고 힘든 시간이 다시온다면 더 잘할 자신도 없으면서 그저 막연히 좀 더 잘 할껄 하는 후회를 남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남은 자의 죄책감, 후회이다. 부모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내 서러움을 위한 서러움.... 내가 너무 냉소적인가???

우리는 정의 내리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원인밝히기도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갖는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이 줄어들게 될까? 죽음이란 이런것이다. 이런원인으로 우리가 죽게된다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함을 안타까워 하기 이전에 지금 주어진 이시간에 감사하고 헛되이 보내는 시간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닥치지않으면 인간은 마냥 늘어지는 존재이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고 죽음은 아직 멀었다고 믿기에 아니 그날이 바로 코앞이라고 해도 오늘 지금 이 시간을 감사히, 그리고 열심히..... 그것이 유한한 존재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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