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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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몰입도 85%
내 알라딘 블로그의 첫번째 리뷰 도서는 바로 천명관이 쓴 소설, 고래였다. 그 엄청난 입심과 뻔뻔함을 보여줬던 그가 6년 동안의 방황 혹은 외유를 접고 다시 장편소설로 돌아왔단다. 이제는 소설에만 전념하겠단다. 반가웠고 설레었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었다. 어쩌면 오랜 방황 끝에 몸도 마음도 상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가 그 방황 속에서 급하게 엮어낸 듯한 단편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도 아직 또렷하니까.
소설 속 주인공인 영화감독이 데뷔 영화를 말아먹고 12년 동안 충무로판을 이빨 빠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 거리다가 다 늙어가는 엄마에게, 자기보다 더 한심한 형이 이미 눌러앉아 있는 엄마의 허름한 연립주택으로 돌아온 것처럼, 스스로 자기는 소설가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드라마와 영화와 연극에 매달렸던 그가,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며,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곳은 역시 장편소설이라는 편안한 텍스트의 품 속이었던가.
오빠는 돌아왔지만 예전의 그 오빠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뚜렷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들과 지쳐 보이지만 꺾이지 않은 입담, 화려한 탈출에의 꿈 등은 여전히 이 소설의 작가가 천명관임을 보여준다. '엄마를 부탁해'를 천명관식으로 각색한 '맘마를 부탁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 작품은 내게 방황을 끝내고 엄마 품으로 기어 들어온 자식이 은근슬쩍 내미는 돈봉투 같은 느낌을 준다. '예전엔 많았지만 다 쓰고 지금 남은 건 이것밖에 없어.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봐' 라고 말하는 듯한. 그래, 아직 우리에게 기다릴 시간은 많다. 그는 이제 막 돌아왔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