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한다는 착각 - 열심히 말하는데, 왜 마음은 멀어질까?
마이클 니콜스.마사 스트라우스 지음, 윤삼호 옮김 / 교양인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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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공감받고 싶다는 욕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고 그 공감을 받고싶다는 욕구는 우리를 강력한 화자, 말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모두가 말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대화와 공감은 적어도 둘이 존재해야 가능한 일이다.
말하고, 들어주고. 공을 던지도 받듯이 실과 바늘처럼 반드시 서로가 존재해야한다. 이 글을 보는 사람중에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보고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큰 행복이다. 잘 들어준다는 것은 진심으로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공감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공감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져 왔다는 것일테니 말이다. 떠오른 사람에게 맛있는 밥이라도 한끼 사주자.

#대화한다는착각 (#마이클니콜스 #마사스트라우스 씀 #교양인 출판)은 상대를 평가한다기 보다 자신을 평가하는 이야기이다. 위의 글을 읽고 응? 나는 꽤 괜찮은 리스너인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제법)있을 것이다. 물론 ‘진짜 잘’들어주는 멋진 청자일수도 있지만 한번 점검해보는 것도 괜찮다. 내가 정말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로인해 함께 대화하는 것이 위로가 되는 청자인지 말이다.

<대화한다는 착각>은 분명히 들어주고 반응해주었는데도 집에 돌아와서 곱씹어 보면 뭔가 찝찝함이 남는 ‘관계를 단절시키는’청자의 유형의 예를 보여준다.
상대가 말하고 있는데 제대로 듣지않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할말을 생각하고 있는 대기실형, 고민을 털어놓고있는 와중에 끼어들어 해결책부터 내어놓는 해결사형, 말하고 있는 와중에 ‘나도 그런데’를 시전해 자신이 말 할 차례로 만들어버리는 가로채기형, 상대가 털어놓는 감정을 부정하는 감정차단형,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슨 말 하는지 다 안다며 멋대로 추측하는 독심술사형, 몸만 여기에 있고 정신은 다른 곳에, 또는 휴대폰에 있는 유령형, 상대방의 감정보다 사실관계를 따지려드는 요점정리형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하나라도 벗어나기가 쉽지않다.

정확하게 나도 나 정도는 괜찮은 청자라고 생각했는데 지레짐작하여 말을 가로막기도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던 적도 있고, 감정에 공감해 주기보다 사실관계를 따져 잘잘못을 따지려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나는 내가 말을 하기위해서 상대방의 말을 끊은 것이 아니다. 지레짐작은 내가 너를 이만큼 잘 안다고, 척하면 척이지를 보여주고 싶어서였고 잘잘못을 따지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도움이 되고싶어서였다(심지어 다 듣고 말했다)

물론 내 주위의 사람들은 참지않고 ‘내가 원한 건 그런게 아니야’, ‘아니야 그거 아니야 끝까지 내 말 들어봐’라고 바로 피드백을 준다. 그덕에 많이 고치려고 애썼고 나름 바뀌었다고 믿고싶다.

그냥 들어주면 될 텐데. 그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만큼 이해받고 싶은 본능이 강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이 주는 기분 좋음이 주는 도파민도 상당하다. 그래서 모두가 화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정작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자기자신이지않을까. 성숙된 바람직한 자아를 위해서는 듣기를 잘 해야한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아 안정을 얻는 것보다 누군가의 말을 경청해서 누군가의 세상을 완성시키는 경험이 스스로에게 주는 만족감이 더 크다.

잘 듣기 위해서는 개인의 관심사, 선입견, 자기 내면에 있는 상처, 불안과 같은 심리적 장애물을 걷어내야한다. 자기자신을 잘 다스려야 비로소 가능한 올바른 관계를 맺는 진정한 청자. 단단한 자신, 좀 더 나은 자신을 위한다면 우리는 화자보다 청자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한다.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 여길수도 있지만 결국 진심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공감하는 것은 결국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게되는 수양임을 깨달았다.
상대방도, 그리고 나도.
조금 더 위안이 되게, 조금 더 편안할 수 있게, 조금 더 세상을 따뜻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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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야마 - 지역 재생 교과서
시노하라 다다시 지음, 김경인.박우현.정석 옮김 / 오늘산책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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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고토 고등 전문학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면서 소멸해가던 지역의 재생을 이룬 가미야마. 어떻게 소멸을 기다리고 있던 지역이 일본 전국에서 20년 만에 문을 여는 전문학교를 유치할 수 있었을까. <가미야마>이 책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 책이다.
그 질문의 답은 전문학교 유치를 넘어서 매우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가미야마는 전문학교가 자리 잡기 전부터 위성사무소, 푸드허브의 먹거리 교육, 지산지소 식당, 가미야마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오노지 집합주택 등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젝트가 만들어지는 곳이었다.

현 단위의 계획이 자신들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만들어져있더라도 탑-다운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도 반영되지 않을 정책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연합체를 조직해 자신들의 의지가 담긴 프로젝트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렇게 아티스트들이 상주하기 시작했고, 아티스트가 두고 갈 작품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아티스트에 집중했다.
하나의 아티스트에 여러 명의 어시스트를 두어 재료 조달과 전시공간 계약과 같은 일을 처리하는 아버지 적 역할, 생활을 세심히 케어하는 어머니 적 역할을 모두 수행하며 예술의 특성상 오래 머물러야 하는 아티스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 챙겨주면서도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도시인들을 배려해 신체적, 정신적 거리를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한번 자리 잡은 아티스트들은 상주기간이 끝나도 다시 방문하거나 아예 가미야마에 자리잡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을 외부인으로 두지 않고 가미야마에 빠르게 흡수시켰다. 고등학교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학생들의 졸업 후 상주, 마루고토 고등학교로 인한 교육관계자들의 이주 등을 단발성으로 그치게 두지 않고 가미야마의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하나의 유기체가 될 수 있게 진심을 다한다.
가미야마의 성공에는 마루고토 고등학교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민들의 ‘능동성’과 ‘진심’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다.

지역민들이 직접 만들어 운영한 프로젝트로 유입된 이주민을 배척하지 않고 진심으로 받아들여 이주민간, 이주민과 지역 주민 사이의 소통에 정성을 쏟는다. 그 결과 소통에서 또 다른 프로젝트가 탄생하고 새로운 이주자를 불러들이는 가미야마만의 선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단발성 제도, 숫자에 급급한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노인층의 유입도 마다하지 않는 눈가리고 아웅 하는 방식의 수동적이고 비적극적인 행동들은 아무리 좋은 기회가 찾아오더라도 가미야마만큼 바뀌지 않는다.

지역재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삶의 태도에 관해서도 많은 깨달음을 준다. 진심과 적극성. 지금 이 순간, 오늘, 앞으로의 인생에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과연 이게 통할까? 라는 다가오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없애줄 확실한 증거 같은 한 권이다.

인생, 프로젝트, 사업, 정책. 모든 것의 교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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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in 도쿄 - 일본 미술관에서 만나는 모네와 고흐, 피카소
전원경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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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라파엘전파부터 추상미술까지의 서양 미술사가 담긴 책을 읽었다. 다 읽은 뒤에 괜히 뒤적거리다가 문득 인상주의는 어느정도 분량을 차지할까 궁금했다.
자세한 페이지는 세어보지 않았지만 인상주의 부분을 두손가락으로 잡고 책배(또는 책입)을 보니 적어도 1/4과 1/5 그 사이 정도 될 것 같았다.
긴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에서 10년 남짓한 특별한 강령도 없었던 하나의 사조가 이만큼이나 분량을 차지하다니. 모네를 좋아하는 나의 입장에선 괜히 뿌듯했다.

나의 모네사랑은 그 전문성에 비해 주변사람에게 알려진 정도가 과하다. 모네를 보면 내 생각이 난다해서 머쓱한 경우도 제법있고 오랑주리 미술관에 자기가 먼저가서 미안하다며 해외에서 연락이 오기도 한다. 오랑주리에서의 긴 하루를 꿈꾸는 사람이긴 하지만 직장인 현대인입장에서 언제나 가능할지 ‘언젠가는’이라는 단어로 그 의지를 놓지만 않고 있다. 이런 나에게 오랑주리의 훌륭한 대체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되었는데 이것도 고마운 지인 덕분이다. 일본여행을 다녀왔다며 스윽 내미는 것. 책갈피인데 누가봐도 모네의 <수련>이다. 도쿄 국립 서양미술관에서 진행했던 모네전을 갔다가 내 생각이 나서 사왔단다. 수련이 일본에 있어? 심지어 ‘모네전’을 할만큼 모네 작품이 많아? 놀라웠다. 그리고 어느정도 찾아보았더니 일본은 인구 50만도 되지 않는 도시에도 모네와 고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을만큼 훌륭한 소장품을 가진 미술관이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픔을 겪고있던 1900년대 초반에 ‘탈아입구’를 슬로건으로 적극적으로 유럽과 교역했을 당시 유럽에서 모네에게 직접 수련작품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사들였다고 한다. 역사의 아픔때문에 아니꼽게 보이기는 한다. 재팬머니라고 불리는 일본의 경제호황시대에 부정적 시선까지 생겨나던 공격적인 소비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 시기에 만국 박람회에 어려번 참가할 정도로 일본은 유럽과의 교류가 상당했고 그 시기가 마침 인상주의가 꽃을 피우던 시기와 맞물려있다. 게다가 교류가 일본의 짝사랑도 아니었다. 일본의 과김한 생략과 강조로 두 눈을 사로잡는 우키요에가 유럽의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다.
그런 우키요에에 대한 매료됨과 애정이 서양 미술사를 논할 때 뺄 수 없는 모네와 마네, 르누아르, 고흐, 고갱, 메리 커셋 등 기라성같은 이들의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이들이 주로 인상주의 화가들이니, 로코코, 르네상스, 고딕, 고전, 나비파, 입체파, 표현주의 등 수많은 시대의 작품이 골고루 있는 일본에서도 특히나 사랑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인상파in도쿄 (#전원경 씀 #세종서적 출판)은 인상파의 탄생과 활동 등 그 유파의 특징을 알려주고(1부) 우리가 몰랐던 인상파와 일본사이에 존재했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2부) 그리고나서 일본, 특히 도쿄에 가서 직접 눈에 담을 수 있는 인상파 작품들, 그리고 인상파를 넘어 꼭 보면 좋은 작품들을 미술관별로 소개해준다(3부)

인상파하면 떠오르는 모네, 그 모네의 시작이었던 각별한 스승 부댕, 모네에 가려졌지만 인상파의 실직적 리더였던 피사로와 시슬레, 모네의 츤데레 선배 마네, 끝내 다른 길을 걸어간 르누아르의 작품을 일본에서 볼 수 있다니. 인상파의 역사를 본고장은 유럽까지 가지 않고 가까운 도쿄에서 모두 살펴볼 수 있다니. 부러우면서도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인상파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인상파를 넘어 미술 전체를 사랑하는 ‘난 그 나라에 가면 미술관은 꼭 가’사람들 모두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무겁지 않으면서도 내용은 꽉 찬 그런 책이다.
책 한권으로 인상파에 대한 2회독을 할 수 있는 것(이론 + 도쿄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 설명)도 이 책의 멋진 부분이다. 책을 읽고 나면 이 책의 표지로 모네의 ‘수련 연못과 일본다리‘가 엄청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도쿄로 휴가 가시는 분들 필수지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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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한정판)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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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 입장에서 하루종일 고양이를 관찰하다보면 참 기가막힌다. 어릴적에는 세상의 호기심으로 일명 ‘우다다’라 불리는 광기의 스프린트라도 했지, 나이가 두자리가 되고나서는 볕 잘드는 캣타워의 가장 윗부분에 올라 창밖을 바라보며 꼼짝하지 않는다. 정말 말그대로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첫만남의 순간에 유리구슬같던 그 둥글고 반짝이는 눈동자에 이 세상을 모조리 담고있는 것일까. 뭐가 그리 신기하고 재밌을까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면 같은 생명체가 맞나 싶을 정도의 낯섦을 자랑하며 바닥에서 자고 있다. 뒷다리까지 주욱 뻗어 좁고 긴 털뭉치형상을 한 자고있는 고양이는 바닥청소의 욕구를 샘솟게 한다.

이렇게 고양이는 조용한 와중에도 한없이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렇기에 집사를 자처하며 밥과 장난감, 츄르를 제의지로 상납하는 나같은 사람들이 있겠지.

#나는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소세키 지음 #열린책들 출판)을 펼쳤을 때, 방에서 책을 조금 읽다가 엎드려 책에 힘을 흘려가며 잠들었다가 또 일어나서 그림 조금 깨작거리고 또 잠드는 인간, ’주인‘의 모습을 관찰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고양이 ’나‘를 보는데 낯설지 않았다. 누가 고양이고 누가 인간인지만 바뀌었지 고양이와 냥집사사이의 흔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똑똑한 고양이라니, 모든 집사들의 로망이다. 사람말 알아듣고, 인간사를 인간 수준으로(어쩌면 그 이상으로)잘 이해하는 고양이를 ’세상에 이런 일이‘, ’동물농장‘같은 곳에 출연시키면 로또맞은 것과 다름없으니.

심지어 ’나‘가 바라보는 그 시대의 일본은 구경거리가 풍부하다.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라 기존의 인간 세상을 구경해도 재밌을텐데 예술, 문화, 기술, 인간들의 가치관까지 동양과 서양의 것. 두개를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으니 ’나‘의 잠재력과 포용력이 참으로 놀랍다.

원래 소설로 생각하고 쓴 작품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사건없이 ’주인‘의 집에 드나드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짐에도 고양이 ’나‘는 모든 것을 듣고 이해하고 계속 바라본다.

인간의 허영심이라 해야할까.
급변하는 사회에서 아무리 지식인일지라도 모르는 분야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데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로 눈치만보고 모르는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면 구렁이 담넘듯 넘어간다. 사업가와 지식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 배척하고 무시하기에 바쁘다.
세상의 다른 것들에는 관심없고 오로지 내가 최고인 것도 뭔가 고양이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고양이가 한숨을 쉬며 인간을 관찰하고 있으니 몹시 부끄럽다.

고양이는 고양이의 시점이 아니라도 여전히 소설에서 많이 등장하는 존재이다. 삭막한 세상에서 누군가의 위안이 되기도 꼿꼿한 모습에 상처를 주기도한다. 하지만 어쨌든 변하지 않는 것은 집사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으로 빠르게 변화하며 지나가는 요즘. 사람들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빠르게 지나간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끊고 심지어 살고있는 세상에 대한 관심도 끈다.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얻었다는 소식을 차단하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고립되다 보면, 모든 사람이 눈과 귀를 막는 선택을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진심어린 눈빛과 말투가 나를 향하는 경험을 다시는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상처를 입지않는 것 말고 어디에서 힘과 용기를 얻어 긍정할 수 있을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쓰메 소세키의 시선은 곱지 않다. 희화하고 풍자한다. 하지만 애정이 있어야 욕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소세키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양이의 사소한 습성을 세밀하게 담아내는 걸 보니 고양이를 조금 더(아주많이) 좋아한 것 같지만 말이다.

영어와 한문에 능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더 넓었던 작가. 그가 보여준 세상의 확장과 그것을 이해하려는 애정과 노력에 대해 곱씹어봐야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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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지 않은 쌍둥이 - 프란츠 카프카 x 에곤 실레 세계문화전집 2
프란츠 카프카.에곤 실레 지음, 홍선기 엮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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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어났을 뿐인데 그것이 죽어마땅한, 세상에서 사라져야할 말그대로 ‘죽을 죄’였던 시절.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거리를 두고 7살 차이의 두 예술가의 적극적인 그려야만, 써야만하는 도피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을 범죄자로 낙인찍는 법과, 자신을 낳아주었으나 사십평생 자신을 옥죄는 감옥같았던 아버지와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생각과 시선으로 부터.

그 두사람은 자신의 글로 죽을 때까지 유명세를 얻지 못했고, 자신의 그림은 외설적인 포르노로 낙인찍혀 눈 앞에서 불태워졌다. 이 둘의 이름은 각각 프란츠 카프카, 그리고 에곤 실레이다. 문학계에서 미술계에서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현상이자 역사인 이 사람들을 빼놓고 각 분야를 논할 수 없는 사람인데 저런 지난한 고통의 순간들을 걸어왔다니.

더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람이 하나의 책에 병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나지않은쌍둥이 (#홍선기 엮음 #모티브 출판)책에 담겨 있는 이 둘은 쌍둥이로, 하나의 융합체로 여겨진다. 카프카는 자신을 벌레로, 100점이 넘는 자화상에서 실레는 스스로를 마르고 툭 튀어나오고 눈은 공허하게, 아름답지 않게 그렸다.

무엇이 그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똑같이’스스로를 그려내게 만들었을까. 그것이 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 두 예술가가 한 테이블에 앉아 지금의 우리에게 건내는 묵직한 질문이다.

그들의 짧은 생애에는 고통이 가득했지만 고통만이 있던 것은 아니다. 깐깐한 그 둘의 성격에도 마음에 들만한 작품을 완성해낸 적도 있고 좋은 인연들과 웃기도 했으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은 어둡다. 괴롭고 안쓰럽다. 평생을 집필한 글을 자신이 죽으면 님김없이 태워달라 유언을 남기는 작가의 심정은 무엇일까. 안정을 찾아 단란한 가정을 꿈꿨으나 마지막으로 그린그림이 임종을 앞둔 아내의 모습이었던 화가의 심정은 어땠을까.

분해하고 불안해 하던 그들의 부(-)의 감정들이 그들을 좀먹은 것일까. 결국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친구덕에 출간되어 수많은 이들의 인생 책이 되었고 불살라지던 그림은 세상에 남아 수많은 관람객이 그의 그림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들이 쓰고 그린 것들에서 인생의 전부가 아닌 슬픔과 불안이 가득담겨있었던 것은 글과 그림이 그들의 도피처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자신을 좀 먹을 때 그들은 붓을, 펜을 들었다. 그리고 종이에다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토해냈다. 자신을 채우고 있는 그것들을 종이에 토해냄으로 그들은 숨을 쉰 것이다.

그렇게까지해서 포기하지않고 처절한 예술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 이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에게도 우리와 같은 이런 불안이 있냐고.
그렇다면 어디 숨을 곳이 있냐고.
그 숨을 곳에서 너는 평안하냐고.
그렇게 구원을 얻었으냐고. 안녕하냐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술가 ‘쌍둥이’지만 나는 간절히 바랬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까지 포함해 ‘세쌍둥이’가 되지 않기를. 별나구나, 안타깝구나 여기고 적절히 풀어내고 담아내며 행복을 즐기며 살아가기를.

물론 나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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