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머묾 세계문학 자아 3부작
알베르 카뮈 지음, 한수민 옮김 / 머묾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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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들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가. 모든 아들들은 경제적 여력이 부족해도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서는 안 되는가. 모든 아들들은 어머니의 장례 바로 다음 날에 이성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가.
‘안 되는가’와 ‘안 된다’ 이 둘 사이에는 ‘이성’이라는 노력과 이해가 담겨 있다. 하나는 개인의, 또 다른 하나는 전체를 대표하는 복수의 사람들의.

일 대 다수라는 것만으로 이 둘 사이에 우위를 정할 수 있을까. 사회를 위해 개인은 희생하고 무시당해야 하는가.
애초에 사회란 무엇이며, 사회를 ‘위한다’는 것은 누가 만든,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절대 기준이 될 만한 것인가.

#이방인 ( #알베르카뮈 지음 #머묾 출판) 속 뫼르소는 읽는 내내 ‘얘는 왜 이래?’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은 오늘을, 내일을, 현실을 보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현실은 그의 현실 속 우리가 더 눈이 가는(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서 멀어져 있다. 하지만 그는 직장이 있고, 친구가 있고, 타인에게 (최소한의) 관심이 있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도 있다.

그렇다면 그 주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정하고 받아주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도 ‘이상한 것’일까. <이방인> 속 사회에서는 뫼르소를 이상함을 넘어 문제가 있다고, 죄를 짓고 있다고(지을 것이라고), 사회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당방위로 바라봐 질 수도 있는 가능성조차 엄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고, 엄마에게 향했어야 할 연민과 사랑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몸과 마음으로 향했다는 것으로 소멸되는 사회.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뫼르소, 사건이 아닌 다른 것으로 죄를 결정짓는 사회. 무엇이 더 이상한가?

카뮈의 그 유명한 ‘부조리’라는 개념이 담겨 있는 소설 <이방인>을 읽기 전에 겨우겨우 <시지프 신화>를 읽었더랬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자신의 신념을 지켜 결국 평생 반복하는 벌을 받은 시지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벌을 받는 시지프,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벌을 피한 시지프. 과연 누가 행복할까. 누가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시지프 신화>처럼 <이방인>에서도 개인과 사회, 제도의 엇나감, 그것에서부터 발생하는 부조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국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살아나가야 하는 것은 본인인데,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옳지 않은 것이라 하니 무엇을 따라야 이 부조리함이 해결될까.
세상이 부조리함으로 가득하다고, 이 부조리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냐고 <이방인>은, 카뮈는 묻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뫼르소의 이질감이 힘들게 했다면 책을 덮고 나서는 사회의 이질감이 뒷맛을 찝찝하게 만든다.
애써 외면해 오려 했던 것을 기어코 마주한 기분.
뫼르소가 남다른 것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발견해낸 이 부조리함에서 우리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녕 중요한 문제였다.

끝없이 바위를 밀어올리는 벌을 받을 것인가.
딱 한 번 눈감고 사회의 안락함을 누릴 것인가.
내 안에 있는 나는 어떤 ‘시지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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