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항복 미술관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지음, 조서현 옮김 / 아트북프레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관. 떠올리면 하얀 벽에 적절한 핀조명을 받으며 각자의 빛을 발하고 있는 많은 작품들이 떠오른다.
작품들은 누군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다.
그 기록은 그 사람의 전부이기도 하고 파편이기도 하다. 전부이든 파편이든, 하나 확실한 것은 그 평면 너머에 무수히 넓은 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틈은 작가가 아니라 관람객의 영역이다. 지극히 개인적이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임에도 자신의 이야기와 삶. 그것에 투영시켜 그 틈에서 자신만의 감상을 길어올린다.
그것이 아픔일수도, 기쁨일수도 있지만.
⠀
#무조건항복미술관 (#두브라브카우그레시치 지음 #아트북프레스 출판)은 제목에서 말하는 하얀 벽의 미술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나라, 그 나라에 속하면서 향유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어느 곳에도 환영받지 못하고 속하지 못하며, 그래도 물리적으로 육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의 언어도 한두마디 정도 밖에 뱉지 못하는 사람들의 조각조각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 글 조각들이 ‘무조건 항복’이라는 이름으로 모여있는 언어의 박물관이랄까.
⠀
하지만 그 글들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하나를 향해 이야기를 진행해 주지 않는다. 어찌보면 글 조각 하나만 보았을 때에도 별다른 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뭔가 특별히 와닿고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천천히 읽어나가면 어느순간 머릿속에서 번뜩임이 발생한다.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고 별 의미없는 것 같았던 글들이 앞 어딘가에서 보았던 흐릿한 기억만 남아있는 무언가와 합쳐져 나에게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
수전 손택의 사진론이 꼭 정리할 것이라 다짐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 비로소 앨범을 구매해 정리기준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어머니와 딱 한장 남편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아내의 이야기와 합쳐진다.
⠀
인물별로 정리할지, 시대순으로 정리할지 이리 바꾸고 저리바꾸면서 나란히 둘 사진을 고르고, 필요없는 사진을 찢어 버려버린다.
⠀
그런가하면 전쟁에서 ‘사라진’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인 남자의 사진을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며 아버지란다 라며 아이에게 보여준다. 그 가진은 군복이 교묘하게 정장처럼 수정되어 있다. ‘나쁜 쪽’의 군복이다.
⠀
이렇게 사진은, “끝없이 펼쳐진 제어할 수 없는 세계를 작은 사각형 안으로 압축한 것이다.”라는 수전 손택의 말처럼 어찌할 수 없이 벌어진 일을 그럼에도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쓸모와 생존을 위해 수정되기는 하지만.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살아갈 수 있게도, 그리고 쓸쓸하게도 한다.
⠀
작가를 비롯한 망명자들의 아픔. 단조로운 일상. 단순한 메모, 예술론. 이런 것들이 얽혀 <무조건 항복 미술관>이라는 사진첩이 되었다. 글로 만들어진 사진 한장한장들은 어느 것이 사실 그대로 인지 어느 것이 의도대로 편집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살아있기에, 살아가야하기에 쓰여진 글이라는 것이다.
⠀
’무조건 항복‘은 포기가 아니다. 더 많은 다음을 위한 결단이다. 비록 그 다음이 이전과는 다른 고통스럽고, 이방인의 모습일지언정,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에 더할 수 없는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과 같다.
⠀
이런 아픔이 있었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 특별해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기도 하다라는 것을 조각조각, 하나하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기억하고 그것들을 스스로 조합해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가면서 더 오래 살아남아 숨쉬게 한다.
⠀
그냥 읽어나가는 단조로운 행동이 계속 이어져야 비로소 <무조건 항복>이라는 미술관의 벽에 걸려있는 것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챌 수 있다.
⠀
그 글들 속 인물들이 겪은 이야기도 그렇다.
관심을 갖고 살피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
<무조건 항복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들을 내 안의 회랑 한 곳에 조심스럽게 걸어둔다.
잊지않고 꺼내보고 생각하고 잊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