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빼그녕 ㅣ marmmo fiction
류현재 지음 / 마름모 / 2026년 1월
평점 :
⠀
모든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소녀. 빼그녕.
그녀가 벗어나고 싶어하는 백송리는 백 씨와 송 씨가 윗마을 아랫마을에 모여살고 있는 작은 마을로 마을 중심에 있는 배밭에사 배꽃이 화사하게 피는 아름다운 곳이다.
두 성씨가 나뉘어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수확하고 남은 배를 모두가 양껏 주워가기도 하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그건 축하할 일이라며 함께 기쁜 마음으로 술잔을 부딪힌다.
정이 있고 순박하다.
⠀
하지만, 이 정과 순박함은 너무나 쉽게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공부를 잘했던 면장네 아들 ‘법대생’이 어느 날 한쪽팔을 잃고 ‘춘입’이라는 여성을 데리고 귀향하자 그의 오른손을 잡아먹은 사람이 춘입이라고, 그렇게 심보다 사악하니 아기도 생기지 않는 거라며 단순히 흉이라기에는 도가 지나친 마녀사냥을 너무나 쉽게 일삼는다.
⠀
그 집의 어른들이 춘입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
이것도 작은 해프닝처럼 만드는 큰 일이 이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인 박정희 정권을 대표하는 단어 ‘간첩’, ‘빨갱이’가 이 마을에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도시에서 춘입은 다니던 공장에 노조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것이 찍혀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그녀를 자기아들에게서 떼어놓으려 의도적으로 접근시킨 ‘샘 아저씨’가 간첩으로 몰려서 대대적인 수사를 받는다.
⠀
자신의 동생과도 같았던 송아지 ‘프랑크’의 죽음, 법대생의 부모님의 독살도 그 ‘반공’사건들과 맞물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데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은 빼그녕의 놀라운 기억력이다.
⠀
이 기억력으로 마을 어른들이 묻어두려 했던 치부들을 드러내고 춘입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원하면 언제든, 얼마든 마음 편히 망각하는 어른들과 달리 다른 것들 다 제쳐두고 오로지 옳고 그름, 윤리적 관점으로 봤을 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무서워하면서도 당당히 말하는 어린 소녀 ‘빼그녕’을 보다 보면 양심이 아파진다.
⠀
유신헌법의 부조리했던 시대상을 그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순수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는 지금도 여전하다.
⠀
병적인 악의가 없어도 연대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쉽게 배척하고, 너무나 평범하게 폭력이 자행되며, 여전히 노동운동이나 이념대립은 광화문만 나가보면 매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
주제가 매우 무겁고 다크하다. 하지만 천재 소녀와 순진하고 익숙한 송백리 사람들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배꽃향과 조청이 되어가는 배 낙과의 달콤함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가볍게 한다. 그로 인해 읽는 독자들의 부담감을 줄이고 뇌를 편안하게 한다.
⠀
그래서 지치지 않은 마음과 정신으로 이 무해함을 관통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나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방관할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의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묵직한 질문과 답들은 기존의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할 것이다.
⠀
무색무취이던 세상이 조금 더 다채로운 세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비록 그 색상이 모두 아름다운 색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라는 확신이 이 책에서 전해진다.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색으로 칠해진 부분을 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마주하고, 그로 인해 다시 아름다운 색으로 칠할 수 있도록 행동할 용기가 나에게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