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악마 (구) 문지 스펙트럼 12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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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레이몽 라디게는 장 콕토가 예찬했듯이 문학의 천재임이 분명하다. 프랑스와즈 사강처럼 또 랭보처럼.....그러나 뛰어난 재능임에도 그의 명성은 조용하다. 지나치게 조숙했고 어이없게 요절하고 만 것 때문일까. 그토록 어린 나이에 이런 문체와 내용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을 보니 새삼 천재는 타고난 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 어디에도 노력의 흔적이 보이징 않는다는 그 천재들의 공통점에다 소박하고 직설적인 어법은 어떤 현란한 어휘와 현학적 문투에도 지지않는 완벽함이 엿보인다 이 완벽한 작품이 널리 알려지지않은 것은 아마도 그 도발적인 내용때문인 것도 있는 것 같다.

어린 소년의 정사문제가 작품의 주요내용을 이루고 있으니까 우리가 20대 이후에나 겪을만한 남녀간의 애정사를 이미 앞당겨 겪었던 라디게는 그 불꽃같은 행운에 징벌을 받은 것일까. 만일 그가 조금만 오래 살았더라면 문학사의 획을 긋는, 아니면 유명한 작가의 책으로 몇개나 더 우리의 감수성을 채워주었을 텐데.

하나의 우연인 것처럼 한때의 놀라움만 던져주었을 뿐 그의 흔적은 지금 너무도 흐릿히다ㅣ무서운 문학적 재능, 악마적이리만치 고뇌가 없는 천재들의 그 재능.... 과연 작품의 이미지는 작가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혹은 자신의 성격을 가장 근접하게 묘사했다면 그의 작품이야말로 우리의 가슴을 때리는 무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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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틱낫한 지음, 오강남 옮김 / 한민사(=동쪽나라)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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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우연히 사찰 객실에서 토마스 머튼의 <고독속의 명상>이란 책을 즉석에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진리에 대한 경외감이 최초로 나를 진실한 삶에의 열망을 불러 일으킨 경험이었다. 수도사 머튼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자기자신에게서 벗어나 있으므로 하나님께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더불어 '주여 그러므로 나로하여금 눈에 보이는 보답을 신뢰하지 말게 하소서'란 간곡한 기도의 독백이 생생하다. 바로 이 책<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에서도 틱냩한 스님은 구원자로서 부처님을 염원하기 보다 자신을 비우고 삶을 충실히 사는 것에서 부처님의 현현이 있다고 말한다.

내 심금을 울리는 이 한결같은 원칙 - 계시에서 나는 다시한번 신의 존재 앞에 전적으로
흡수된 존재자의 삶을 직감한다. 다만 내가 세상에 대해 아무 요망없이 관망하며 주어진 삶에 투신할 때 마찬가지로 그 어떤 굉장한 누가 그처럼 간섭없이 오로지 포용하고 있다면 때때로 느껴지는 그 존재자의 응시를, 그 신을 나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때로 '하느님'이라고 불러도 좋다.

틱냩한 스님은 명명을 종교적으로 꼭 필요한 요건이라고 보지 않았다. 종교는 관념적 작업을 요구하는 관념적 상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천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직은 종교에 관한 버리지 못하는 단점- 그 신, 그 신에 대한 교리, 교단 등에 대해 선택하고 규정하려는 태도-에 그분은 적절한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그는 이 책에서 조심스럽게 종교인의 편협성-각자의 종교를 절대 불변의 진리로 인식-을 지적하면서 끝으로 참된 이해와 사랑의 실천을 바탕으로한 평화의 경지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끊이지 않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갈등 앞에 스님의 종교관은 가장 궁극적이고 현실적인 화해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한마디로 마음을 다해 사는 것! 숨쉬고, 먹고, 일하고, 자는 등의 일상생활 하나하낭 성심으로 몰입하는 것을 그는 '마음을 다함'의 자세라고 보았다. 또 이 순간이야말로 신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종교적 경지라고 그는 직시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그토록 귀의하고 싶은 종교는 고통을 회피하고 어떤 쾌적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빠져 일상을 도외시해야 할 만큼 그렇게 가벼운 길이 아닐 것이다.

종교가 특별한 형식과 강요를 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마음을 다해 삶을 사는 이 사소한 수행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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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 시사일본명작시리즈 3
시사일본어사 편집부 엮음 / 시사일본어사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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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고뇌가 동반되지 않은 사람, 특히 단순 우직하기만 한 사람을 문학도로 그것도 천재성으로 만난 다는 것은 희귀하다. 어떻게 문학과 예술을 하는 사람이 우둔하고 순진할 수있을까. 나쓰메 소세키는 아마도 천성이 그랬던 것 같다. 하나도 구김살이 없는 명쾌학 절도있는 문체. 세상에 대해 날카로운 풍자보다는 해학적인 풍자쪽으로 기우는 묘사법은 도무지 이런 성품이 아니고선 표현해낼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은 곡 불행한 사람, 고뇌하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백히 입증하는 작가는 얼마든지 있다. 아니 그런 태평한 사람의 예술을 우리는 어쩌면 천재라 명명할른지도 모른다.

어둠의 예술은 칙칙한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니만큼 난해하고 복잡한 구석이 있어 다가가기 힘들지만 그 천재의 예술은 번뜩이는 예지는 금새 광채를 띠고 일쑤다. 우리는 천재를 알아보는 눈에는 기가막히니까. 또 그 천재성의 댓가로 신은 그 사람의 목숨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기도 한다. 아무튼 나쓰메 소세키식 문체는 언어의 천재라불러도 좋을 만큼 명쾌하고 소박하다. 전혀 날카롭지도 섬세하지도 않고 전혀 예상 밖으로 소박한 문체가, 사랑스런 문체가 있을 수도 있다니.

그는 별 고생없이 평생 엘리트이자 정직하고 벽창호같은 고지식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작품 곳곳에 자기자신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거의 긍정적이리만큼 객관적이고 무사태평한 묘사를 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나는 고양이다>지만 그 소설보다 뛰어난 것으로 나는 단연코 <도련님><그후>를 꼽고 싶다. 시골학교로 갓 발령난 우직하고 단순하고 고지식한 선생이 그 학교선생과 학생들 사이서 묘한 이용을 당하지만 결국 그 성품으로 인해 도리어 그들을 이겨내는 통쾌한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작가는 아주 소박한 문체로 주인공의 속기쉽고 어리숙한 성격의 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후>는 나쓰메의 또다른 명작이다. <도련님>의 해학미에 비한다면 색다르게 슬픔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예전의 사랑하던 여자의 불행을 지켜보며 도와주는 과정에서 점점 다시 사랑에 빠져가는 내용.. 어찌나 담담하고 온후하게 그리고 있던지....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순하고 투명하다는데 인간적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순진하기에 불안함마저 주는 그 어린이같은 어른의 주인공들, 만나지 않아도, 창조의 인물도 아닌, 전혀 무겁지 않은, 정열적이지도, 섬세하지도 않은 그 주인공들, 곧 작가의 분식들,,, 그 친근감을 느껴보시라.

글이 구지 묵직한 사상을 반영하고 비극을 담아야 불후의 명작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면
진솔함과 군더더기없는 신변잡기적인 깔금한 내용으로도 얼마든지 광채를 띤다면 그것은 아마 그의 작품이 아닐까. 더군다나 우리의 근대소설과의 수준을 가늠해보면 그 시대 일본 작가의 문학적 현대성은 지금의 문학에 견주어도 전혀, 아니 그 이상을 압도하는 탁월함이 있어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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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예니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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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고등학교 도서관 써클활동시 도스또엡스키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다. 이때 처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다. 물론 그 당신엔 소위 애써 지식인 젊은이의 비관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라면 무엇이나 매료되었기 때문에 이 장문의 작품을 독파했다는 것은 일종의 자부심과 함께 무조건적 숭배를 했을 다름이다. 하지만 솔직히 대충대충 읽었기 때문에 큰 줄거리와 동시에 인물의 성격마저 두리뭉실하게 오해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작품의 심상치않은 무게감각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나는 예전부터 그 작품을 명작의 대열에 고집스럽게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정도 고정관념과 예리한 분석력이 더이상 진보가 없는 근래 이 책을 재독했다.

그리고 몇달 간 질질 끌어가며 마침내 이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여전히 이 작품의 수준을 깎아내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중간중간엔 추리소설같은 냄새를 풍기면 속도감을 느꼈고 간혹 장황한 대화, 인물묘사에 엄청 지루해 하기도 했다. 후반부에선 법정소설적 수법과 함께 여전히 흥미진진하다가 따분하다가 하면서 한시 독자의 마음을 가만두지 않았다고 할까. 말하자면 해발높은 등산을 우여곡절 끝에 정복한 것과 흡사한
여운을 남겼던 대작이었다.

물론 최근 작가들의 세련되고 톡톡쏘는,흡인력있는 문체를 구사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겉만 번지르르한 문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집요한 면으로 독자를 압도하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단 등장인물의 개성을 너무도 판이하고 독특하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확연하고, 이처럼 분명하고 이처럼 인간 그 자체의 전형을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신랄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이토록 스케일이 크게..... 그의 무거움, 그의 남성적 수법, 집요한 인간관찰에 대한 인내력, 글발에 거의 경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2000년 인류의 문학사에 5대 귀재임을 나는 단연코 말하고 싶다. 결국 문학은 문체가 주는 희귀한 재능의 귀재도 가치있는 것이긴 하지만 작가의 사고, 재능, 경험 이 모든 3박자가 드라마틱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스또엡스키는 그 전형이다. 표도르 까마라조프, 스메르쟈코프, 이반 등이 악의 상징이니 드리뜨리가 정직, 알료샤가 성스럼움의 상징이니 하는 구태의연한 말로 이 책을 격상하는데는 질렸다.

그러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을 지녔음에도 인간사회의 이모저모 인간형의 전형이었다는 생각뿐이다. 완전히 개연성있는 인간들.....

이 책의 개성적 인물들 중에 나는 역시 '이반'을 꼽고 싶다. 전형적인 현대의 고뇌하는 인간형의 상징이랄까. 전에 이반의 무신론과 비관론에 꽤나 매혹을 느꼈는데 이제보니 이반이 참 불쌍한 인간이란 사실이 재독후의 약간 달라진 점이다. 이반은 스메르쟈코프보다 냉혹하지 않다. 반면 양심이란 것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다. 이것이 속마음은 아버지 표도르의 '악'과 닮았지만 또 닮지않게 하는 구분이랄까. 이반의 그처럼 이중적 성격은 곧 인류의 대다수가 지닌 고뇌와 악의 이중적 속성 그것이다.

알료사같은 인물이 사회에 사분의 일이라도 있다면 세상은 축복받은 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겉과 속이 일치하는 성자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작가의 이상형인 것이 분명하다. 그처럼 사람을 분별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사랑하며 평등하고 보이지 않는 유일한 진리를 하느님임을 인식하고 또 그 신처럼 인간을 사랑했던 인간.........이 글이 미완성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알료샤의 방황기가 통째로 빠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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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의 의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수남 옮김 / 청하 / 19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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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지배적 사상을 듣고 싶지, 네가 멍에를 벗어났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독자적 생활영역, 미, 용기, 문화, 커다란 사치, 턱이 없는 힘, 부유, 선과 악의 초월, 이것이 신들이요, 초인이다. 이들은 언제나 가볍다. 아! 이 이르지 못한 것들 때문에 나는 얼마나 지쳐있는가.....

이 니이체의 열정적, 신들린 듯한, 다가와서 멱살을 붙잡으며 다그치는 듯한 말을 들어보라. 그의 어휘는, 그의 사상은 이처럼 사정없이 밀려드는 파도같이, 덤벼드는 야수같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에너지로, 그리하여 광기어린 것처럼 우리의 머리에, 적어도 세상의 진리를 한번쯤 생각해보았고, 그 세상에 한번쯤 지쳐있는자의 머리를 번쩍 들어올릴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허무한 자에겐 거의 매혹적일만큼 거칠고 야수적이다.

야스퍼스는 니이체는 가장 병든자, 자기모순, 불안, 좌절 때문에 무에의 강한 정열을 가졌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하이데거는 단지 허무주의자라고 비평했다.. 뢰비트는 <그는 위대한 사상가인가, 장애받은 시인인가>라고 물었다. 때로는 영원한 회귀의 철학자라고 했다. 베르그송은< 무한한 충동으로서 삶의 약동을 긍정하고 삶의 창의성, 존재의 생명,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했다.

니이체는 따라잡을 수 없는 강자의 세계이며 초인의 세계에 대한 심한 질투심을 느낀 것일까? 약자를 사정없이 깎아내리면서도 실은 그는 누구보다도 약자였던 니이체....나의 그에 대한 견해는 그렇다. 이 책 <권력에의 의지>에서만큼 니이체의 격렬한 개성, 거침없는 반항정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책도 없을 것이다. 시종일관 강자에의 예찬과 불만족한, 가식의, 거짓의 표피적 도덕적 현실에 대한 반항, 언어적 폭력을 휘둘러댄다. 무엇이 그를 결국 광인으로 몰아간 걸까? 그는 그가 쓴 언어대로 초인이었는가, 초인, 강자를 향한 우상숭배자였는가, 진정한 의미에서 복종하고 싶은 초인이 없어서 마침내 지치고 돌아버린 약자였는가.

그는 왜 그처럼 불안하게 그처럼 변덕스럽게 사상과 주관을 초지일관하지 못한걸까. 젊은날 바그너를 신봉했다가, 격심한 모멸을 느낀 예만 봐도 그렇고.

그의 사상은 병적 사상의 유물인가, 아니면 병적 인간이 만들어낸 우발적 진리인가. 아, 나는 그를, 그 광인의 매력에 사로잡혀 도대체 어떻게 그를 바라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흔히 그의 철학에 지칭하는 '허무주의''영원회귀' 등의 거창한 말뜻에 진의조차 난 잘 모르겠다. 나는 단지 그의 철학에, 그의 철학적 매력, 폭풍과 같은 그 언어의 반항에 몇번이고 몇번이고 매혹당했다는 것 뿐. 그의 말에 따르자면 나란 인간이 완전 약자임에.....
나를 사장없이 모욕했음에도 불구하고....일종의 메저키스트처럼. 나는 흥분과 희열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철학에 두어달 동안 꼼짝없이 갇혀 포로가 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니이체의 초기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보면 그의 아직 개성없는 철학, 평범한 철학에 놀랄 것이다. 그가 광인이 되기 직전 마지막 작품인 <권력에의 의지>는 그의 혼, 정상적인 혼을 앗아가버린 역작이다. 영혼을 담보로 혼신의 역작을 쓴 니이체, 그는 진정한 철학가며 예술가며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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