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메리 사우스 지음, 변용란 옮김 / 책봇에디스코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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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를 읽으며 떠오른 두 사람이 있다. 김기덕 감독, 김언희 시인이 그들이다. 김기덕 감독의 기이하면서도 폭력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세계는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들 알고 있을 것이고. 김언희 시인은 대학시절 레포트 쓰느라 읽었던 시집인데 읽고 나서 한동안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잔인함을 느꼈다.

[이 가죽 트렁크/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지퍼를 열면/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수취거부로/반송되어져 온/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채 쑤셔박혀 있는, 이렇게 코를 찌르는, 이렇게/엽기적인]

김언희 시 「트렁크」를 읽고 동기들에게 '나만 이상한 거야?'라고 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쩐지 토막살인을 떠올리게 하는 으스스하고 기분 나쁜 느낌. 그리고 꽤 오래간만에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책, 《당신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를 읽으면서 말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죄악인 것 같은 조심스러운 느낌, 비온 뒤 습하고 어둡고 축축하고 누군가 쫓아오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뛰다시피 빠르게 옮기게 되는 듯한 기분이랄까. 기묘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있으면서도 불편함에 한번에 쭉 읽을 수가 없었다.

신체 기증을 위한 존재인 '키이스keith'들을 관리하는 간호사가 그중 한 아이에게 특별한 연민을 느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첫 번째 작품 「키이스 프라임」부터 기이하다고 느꼈는데, 남자 간호사인 주인공이 자신이 재직 중인 요양병원 환자들이 폰섹스하는 걸 녹음해 들으며 승무원 여자친구와 섹스를 나누고 비틀린 사랑을 갈구하는 「사랑의 시대」에서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을 의심하곤 했다.

본체의 동의를 받아 생산된 인체기증자, 비틀린 사랑을 꿈꾸는 커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왜곡된 성의식으로 애인을 잃게 된 사람, 선천적 장애를 지닌 딸을 본따 만든 건축물로 성공을 거둔 건축가 등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불행이라는 촘촘한 그물망 안에 걸린 생선같다. 그물망은 촘촘하게 정비해 어느 한 곳 뚫고 도망갈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메리 사우스가 창조한 거대한 디스토피아에서 이들은 기이한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읽거나 혹은 도망치는 수밖에는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독자들에게 뿌리 깊은 불편함을 선사하는 메리 사우스만의 작품세계에는 확실히 보편적이지 않은 특별함이 엿보인다.

표제작인 「당신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가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검색엔진 기업에서 일하는 여자가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온라인과 현실에서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강간범은 취향도 형편없어야 마땅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일반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개 산책을 시키고, 여자친구를 사귀고, 성공 가도를 걷는 등 너무나도 평범하게 살아간다. 절망적인 여자가 인터넷 사이트에 "왜 우리는 선한 모든 것들을 파괴할까요?"라는 질문을 올렸을 때, 어느 유저가 이런 답을 남긴다. "우리가 갓 내린 새하얀 눈밭을 어지럽히고 싶어 하는 이유와 같아요." 여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이 잔인하게 파헤치는 느낌이었다. 메리 사우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하얀 눈밭을 거침없이 어지럽힌다. 다음엔 또 어떤 문제작으로 불편함을 선사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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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 - 끼니를 때우면서 관찰한 보통 사람들의 별난 이야기
유두진 지음 / 파지트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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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남편과 태국으로 여행을 갔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큰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어 여행하는 동안 행복하다가도 불안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렇게 즐거움 반 긴장 반으로 마지막 날엔 거의 소강상태였고 맛집을 알아보거나 할 여력도 없었다. 마침 쇼핑을 갔던 참이어서 남편과 나는 푸드코트에 가서 아무거나 사 먹기로 했다. 국물에 밥 말아 먹고 싶은 마음에 똠얌꿍을 시켰는데, 맛집도 아니고 그냥 푸드코트 음식인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한 그릇 다 비우고 밥도 추가해서 더 먹었다. 뜨끈하고 새콤매콤한 국물을 떠먹으니 어찌나 개운하던지. 남편이 시킨 메뉴는 기억조차 안 나는데, 그날 먹은 똠얌꿍은 아직도 떠올리면 입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참 맛있었던 기억이다.

뜬금없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식사 이야기를 한 건 바로 이 책, 《끼니》 때문이다. 서문에 살면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뭐였냐는 저자의 질문이 있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한 끼도 아니고 스페셜한 오마카세도 아닌 그냥 소박한 한 끼가 기억에 남았던 걸 보면 맛보다도 상황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는 큰 일에 대한 두려움과 여러 가지 현실적인 걱정을 뜨끈한 한 그릇이 데워준 게 아닐지. 아무튼 그때의 기억으로 수술도 잘 마치고 건강하게 잘 회복할 수 있었다. 밥심이라는 말이 헛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저자에게 밥심을 주었던 끼니, 감동을 주었던 끼니, 행복함을 선사했던 끼니는 어떤 음식이었을까 궁금해하며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 속에는 저자가 끼니를 때우면서 관찰한 별난 사람 &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선거 출마하는 선배를 응원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히 만난 싸고 맛있는 냉면집 이야기에는 내가 다 입맛이 다셔졌다. 하지만 이름도 길도 기억하지 못해서 영원히 추억 속으로 묻혀졌다는 부분에서는 함께 아쉬워했다. 사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던 터라 남일같지 않았다(난 중국집이었지만). 심지어 계산도 내가 안 해서 카드명세서를 뒤져볼 수도 없다는 게 함정...

아버지 지인 딸 결혼식에 축의금 전달하러 가면서 뷔페인 줄 알고 실컷 먹을 마음에 신이 났는데, 스테이크 코스 요리라고 해서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먹을 수 없다며 그냥 발길을 돌렸다는 대목에서는 화가 났다! 아니, 모르는 사람 사이에 끼어서 먹으면 좀 어때서? 스테이크인데?! 아직 혼밥 내공이 나보다 못하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음식이라면 모르는 사람 아니라 모르는 사람 할아버지랑도 동석 가능한 거 아닙니까, 작가님?!

반면 많이 먹으려고 선배 결혼식에서 먼저 식사부터 하고 결혼식에 가서 사진도 찍고 다시 재입장해서 소식하는 척 많이 안먹는 척 하다 선배 사촌 여동생한테 두 번 입장한 걸 들킨 부분에서는 내가 더 창피했다. 시간순서가 언제가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두 번 입장도 하신 분이 스테이크 포기라니...작가님, 먹는 걸로 장난(?)치시는 거 아닙니다. 그러시면 곤란하다구요.

혼밥 10단계를 저자가 가장 먼저 적은 거라며, 1단계인 편의점에서 혼자 삼각김밥 먹기부터 10단계인 꼼장어 집이나 삼겹살집에서 혼자 구워 먹기를 모두 해봤다는 부분에서는 또다시 분노했다. 아니, 이것도 성공하신 분이 스테이크는 왜 못 썰고! 다음부터는 저자가 꼭 모르는 사람 사이에 끼어서라도 스테이크 코스요리를 먹고 왔으면 좋겠다. 왜이렇게 스테이크 코스요리에 분노하냐면, 내가 스테이크에 정말 진심이라서 그렇다. 못 먹고 나왔다는 부분에서 책장 잠시 덮었다는 불편한 진실....

아무튼 읽는 동안 별난 사람(a.k.a 진상) 이야기에 함께 어이없어하고 분노하며, 보통 사람 이야기에는 어쩐지 짠하면서도 공감하다 보니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앞으로도 끼니를 챙기는 동안 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람 냄새 나는 재미난 이야기들로 끼니2를 냈으면 좋겠다. 먹고 싶어서 침 꼴깍 삼키며 읽을 준비는 이미 되어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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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말들 - 인생에 질문이 찾아온 순간, 그림이 들려준 이야기
태지원 지음 / 클랩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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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자주 가던 바에 걸려 있던 그림이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유난히 시선을 잡아끌던 그림. 남편이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나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유일하게 불을 밝힌 곳, 도시인들이 모여 저마다의 인생을 풀어내는 공간. 마치 그림이 나에게 너만 외로운 게 아니라고, 인생은 원래 그렇게 외로운 거라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나중에는 그림을 볼 요량으로 혼자 바에 들르기도 했다. 그림을 안주 삼아 이름 모를 칵테일을 홀짝거리면 알콜이 주는 힘인지 그림이 주는 힘인지, 아무튼 더는 외롭지 않았다. 그게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물론 레플리카겠지만).

그림이 내게 말을 건넨 순간은 또 있다. 몇십 분이고 같은 자리에 서서 한 작품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되는 순간. 이중섭의 「황소」가 그랬고 에바 알머슨의 「나비」가 그랬다. 그림은 내게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말해주기도 하고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너를 펼치라고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런 순간을 경험했기에 태지원 작가의 《그림의 말들》을 만났을 때 더욱 반갑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책은 브런치에 연재했던 명화를 통해 얻은 지혜와 통찰에 관한 글을 엮은 두 번째 책으로, 인생에 질문이 찾아온 순간마다 그림이 들려준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알아야 할 것들 / 나 자신과 잘 지내고 싶다면 / 적당한 거리가 관계를 아름답게 만든다 / 지치고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는 법 등 네 개의 챕터로 꾸려져 있는데, 작가가 겪었던 일들에 대한 솔직담백한 이야기에 알폰스 무하, 요하네스 베르메르, 폴 고갱, 테오도르 루소, 폴 세잔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들이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어릴 땐 막연히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어른의 스탠스를 취하게 될 줄로만 알았다. 결혼하면 외롭지 않을 줄 알았고, 마흔이 되면 흔들리는 일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내일모레가 마흔인데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고 삶이 어렵게 느껴지는 순간을 수도 없이 많이 마주친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데, 벌써 수천 번도 더 흔들린 것 같습니다만...아무튼 살면 살수록 쉽기는커녕 어려운 일이 늘어만 간다. 마치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게임처럼.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 그 속에서도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나갔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읽으면서 깊이 공감했고, 어떤 부분에선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실패와 성공에 대한 기준 이야기였는데, 작가도 나처럼 어떤 일을 하던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실패'라고 규정해왔다고 한다. 실패와 성공만 존재하는 이진법의 세계에서 살아왔고, 완벽히 성공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고. 나는 내 얘기를 적어놓은 줄 알았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보니 시작하기도 전에 두려워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했다. 시작도 전에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 남들에게는 잘도 '시작이 반'이라며 응원해줬으면서, 왜 자신에겐 그러지 못했는지.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미친 듯이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자아상을 세우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작가의 말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모두가 길 위에서 저마다 외롭지만 새롭게 알게 된 그림의 말들이 있어 더는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다음에는 또 어떤 그림이 내게 말을 건네고 위안이 되어줄까?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너무 좋은 그림, 그리고 그림의 말들로 오래간만에 일상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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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빛나서, 미소가 예뻐서, 그게 너라서
김예채 지음, 최종민 그림 / 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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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수줍게 인사를 나눴던 밤의 골목길에서였을까, 마주 앉아 맥주잔을 부딪치던 호프집에서였을까,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살며시 손을 잡았던 때였을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서로에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져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밤을 새워 통화하다 휴대폰을 귀에 얹은 채로 잠이 들기도 하고, 톡이 오길 기다리며 어딜 가든 손에는 꼭 휴대폰을 들고 다니던 시절. 우리의 모든 행동은 오로지 한 단어, '사랑'만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긴 내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이야.”
꽃다발을 내밀며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웃는 얼굴이 콤플렉스였던 내게 웃는 게 너무 예쁘다고, 눈이 반짝반짝한 게 너무 사랑스럽다고 말해주던 그와 결혼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우리는 투닥거리지만 사랑하며 살아간다. 흔히들 말하는 부부는 의리로 살아간다든지, 가족끼리 스킨십 하는 거 아니라든지 하는 말을 나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불같이 타오르는 열정적인 사랑은 아닐지라도, 가슴 떨리고 설레는 기간은 지났을지라도 우리는 분명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눈이 빛나서, 미소가 예뻐서, 그게 너라서》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사랑의 시작과 절정, 그리고 이별과 추억까지 한 권에 담겨 있다. 밤마다 그 사람이 마음에 툭 걸리고,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걸 보면 어김없이 그 사람 생각이 나고, 생각만 해도 목울대가 울렁거리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사랑하고 사랑받음에 이러다 행복해 죽겠네 싶은 그런 기분. 이 책은 사랑할때 느끼는 다채로운 감정을 통해 우리를 '가장 열렬히 사랑하던 그때'로 되돌려 놓는다.

마치 옛날 싸이월드 감성을 느끼게 하는 글과 그림이 참 정겹게 느껴졌다. 추억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이었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싸이갬성 is back! 인 건가? 하긴. 우리가 연애하고 결혼했던 때가 2013년, 싸이월드와 카카오스토리의 말년 즈음이었으니 우리의 사랑도 어떻게 보면 싸이감성의 일환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땐 지금 보면 오글거린다고 하는 표현도 '퍼가요~♡'의 대상이 되던 때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오글거린다, 중2병이다라는 놀림이 사랑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걸 저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책 속 글귀처럼 나는 사랑할 때만큼은 나이 먹지 않고 오래오래 철없고 싶다. 오글거리는 표현도 앞으로 더 많이 하고 싶다. 그래야 사랑이 오래도록 녹슬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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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경제사 수업 - ‘보이지 않는 손’에서 ‘후생경제학’까지 13가지 대표 이론으로 배우는
조너선 콘린 지음, 우진하 옮김 / 타인의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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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우리 학교 문과 선택과목은 정치, 경제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나는 고민 없이 정치를 선택했다. 정치는 그나마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라도 했지만 경제는 아예 처음 듣는 용어도 많았기 때문에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경제활동이 없는 학생에겐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대학생을 거쳐 직장인이 되었을 때도 딱히 관심을 둘 일이 없었다. 회사에 다닌다는 행위 자체가 경제활동이지만, 한국말 한다고 국문학에 대해 빠삭한 사람 별로 없듯 경제활동 한다고 해서 경제학을 다 아는 건 아니더라(일단 나만 봐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경제란 여전히 내게 멀고도 먼 이야기였는데, 《나의 첫 경제사 수업》이라는 책 출간 소식을 듣고 제목을 딱 보자마자 '오, 이거면 까막눈은 피하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많이들 아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든지 '마르크스 이론'이라든지, 그 정도만 알고 있는 생초보라 이번 기회에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책은 세계사를 바꾼 13인의 위대한 경제사상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들은 가장 위대한 경제사상가는 아니지만 위대한 경제적 사고를 대표하는 이들이라고 한다. 선정 기준은 오늘날의 경제적 사고의 지적인 구성에 얼마만큼 기여를 했는지였고 이를 토대로 선정된 13인은 애덤 스미스/데이비드 리카도/존 스튜어트 밀/카를 마르크스/앨프리드 마셜/조지프 슘페터/존 메이너드 케인스/프리드리히 하이에크/밀턴 프리드먼/존 포브스 내쉬 2세/대니얼 카너먼/아마르티야 센/조지프 스티글리츠 등이다.

책의 콘셉트나 대상의 선정 기준은 좋았다고 생각한다(비록 나는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외에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다만 이 책의 타겟층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나같은 왕초보는 절대 아닐 거라고 답하고 싶다. 제목의 '첫'이라는 표현 때문에 나처럼 경제의 경 자도 모르는 사람도 기초부터 배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적어도 경제에 대한 기본 개념은 잡혀 있는 상태여야 이 책을 좀 수월하게 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조너선 콘린이 독저자인 줄 알았더니 그를 필두로 여러 명이 집필한 책이었다. 여러 명의 저자를 다루는 만큼 여러 명이 나눠 쓸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쭉 저술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부분은 분명 있었다. 관세청장이었던 애덤 스미스가 관세청장의 일을 하는 걸 싫어했다는 이야기. 특히 그는 자유무역을 제한하는 행위를 지극히 싫어한 나머지 자신의 옷가지 중에서 수입된 제품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성격이 보통은 아닌 양반인 게 확실하다. 하긴, 보통내기가 아니니까 경제학의 기틀을 세우기까지 했겠지만.

존 스튜어트 밀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의 기업에 비해 노동자가 직접 관리하는 기업이 더 효율적일 거라 믿었고, 협동조합이라는 개념에 매료되어 협동조합 방식의 생산을 옹호했다고 한다. 노동자 계급의 교육수준, 지적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노동자들이 본격적인 형태의 협동조합을 추진하게 될 것이라는 걸 미리 예측한 것이다(그 시대에!). 그 당시 경제분야에서는 굉장한 혁명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봐도 놀랍다. 현재의 상태를 정확하게 예측한 거나 진배없으니.

'경제'라는 용어는 있었지만 '경제학' 혹은 '경제학자'라는 말은 없었던 시절, 경제학의 기반을 만들어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단하면서도 어렵게 느껴졌다. 배우려고 책을 읽는데, 책을 읽기 위해 또 배워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분명히 읽어볼만한 가치는 있다. 지금은 어려워서 찾아보면서 읽고, 검색하면서 읽고 하느라 속도가 느렸지만 다음에 읽어볼 땐 지금보다는 더 읽기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잠깐 이런 생각도 했다. '선택과목을 경제로 했으면 지금보다 읽기 쉬웠을까?' 뭐, 암기식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큰 차이는 없었을 것 같지만. 근 20년 만에 그런 생각을 해볼 정도로 간절히 수월하게 술술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좀 더 곱씹고 다져서 조만간 꼭 다시 읽어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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