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말들 - 인생에 질문이 찾아온 순간, 그림이 들려준 이야기
태지원 지음 / 클랩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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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자주 가던 바에 걸려 있던 그림이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유난히 시선을 잡아끌던 그림. 남편이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나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유일하게 불을 밝힌 곳, 도시인들이 모여 저마다의 인생을 풀어내는 공간. 마치 그림이 나에게 너만 외로운 게 아니라고, 인생은 원래 그렇게 외로운 거라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나중에는 그림을 볼 요량으로 혼자 바에 들르기도 했다. 그림을 안주 삼아 이름 모를 칵테일을 홀짝거리면 알콜이 주는 힘인지 그림이 주는 힘인지, 아무튼 더는 외롭지 않았다. 그게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물론 레플리카겠지만).

그림이 내게 말을 건넨 순간은 또 있다. 몇십 분이고 같은 자리에 서서 한 작품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되는 순간. 이중섭의 「황소」가 그랬고 에바 알머슨의 「나비」가 그랬다. 그림은 내게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말해주기도 하고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너를 펼치라고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런 순간을 경험했기에 태지원 작가의 《그림의 말들》을 만났을 때 더욱 반갑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책은 브런치에 연재했던 명화를 통해 얻은 지혜와 통찰에 관한 글을 엮은 두 번째 책으로, 인생에 질문이 찾아온 순간마다 그림이 들려준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알아야 할 것들 / 나 자신과 잘 지내고 싶다면 / 적당한 거리가 관계를 아름답게 만든다 / 지치고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는 법 등 네 개의 챕터로 꾸려져 있는데, 작가가 겪었던 일들에 대한 솔직담백한 이야기에 알폰스 무하, 요하네스 베르메르, 폴 고갱, 테오도르 루소, 폴 세잔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들이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어릴 땐 막연히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어른의 스탠스를 취하게 될 줄로만 알았다. 결혼하면 외롭지 않을 줄 알았고, 마흔이 되면 흔들리는 일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내일모레가 마흔인데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고 삶이 어렵게 느껴지는 순간을 수도 없이 많이 마주친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데, 벌써 수천 번도 더 흔들린 것 같습니다만...아무튼 살면 살수록 쉽기는커녕 어려운 일이 늘어만 간다. 마치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게임처럼.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 그 속에서도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나갔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읽으면서 깊이 공감했고, 어떤 부분에선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실패와 성공에 대한 기준 이야기였는데, 작가도 나처럼 어떤 일을 하던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실패'라고 규정해왔다고 한다. 실패와 성공만 존재하는 이진법의 세계에서 살아왔고, 완벽히 성공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고. 나는 내 얘기를 적어놓은 줄 알았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보니 시작하기도 전에 두려워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했다. 시작도 전에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 남들에게는 잘도 '시작이 반'이라며 응원해줬으면서, 왜 자신에겐 그러지 못했는지.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미친 듯이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자아상을 세우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작가의 말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모두가 길 위에서 저마다 외롭지만 새롭게 알게 된 그림의 말들이 있어 더는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다음에는 또 어떤 그림이 내게 말을 건네고 위안이 되어줄까?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너무 좋은 그림, 그리고 그림의 말들로 오래간만에 일상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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