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들리와 그레이스
수잔 레드펀 지음, 이진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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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프랭크 때문이다. 《하들리와 그레이스》는 남편인 프랭크에게 속박당해 자신의 색을 잃어버린 채 살던 하들리와 고용주인 프랭크에게 협박당해 자신의 몫을 받지 못하고 해고될 처지에 놓인 그레이스가 우연히 프랭크의 사무실에서 마주치면서 함께 금고를 털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피하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프랭크가 아내인 하들리에게 의처증 증세만 내보이지 않았어도, 딸 매티에게 폭군처럼 굴지만 않았어도, 그레이스에게 원래 주기로 했던 인센티브만 제대로 지급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사실상 악독하고 교활한 프랭크 때문에 사건이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원래 하들리는 자신이 키우고 있던 조카 스키퍼를 엄마인 바네사에게 데려다 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모든 가족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고 흔들지 않으면 못 배기는 폭군 프랭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스키퍼를 데려다주고 자신과 딸 매티는 멀리 도망치기로 한 것. 도피에 필요한 자금은 프랭크의 비밀금고에서 충당하기로 결심한다.

그레이스는 주차장 사업을 하는 프랭크 밑에서 일하며 주차장 관리계약을 따내면 10퍼센트의 수수료를 받기로 했지만, 교활한 프랭크는 오히려 그레이스를 협박하며 계약서의 수수료 부분을 찢어버리기에 이른다. 게다가 곧 그녀를 해고할 계획까지 세운 상황.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레이스는 계약서를 빼돌리기 위해 프랭크의 사무실로 향한다.

한밤중 프랭크의 사무실에서 맞닥뜨린 하들리와 그레이스! 처음엔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돈을 나누는 비율을 가지고 끊임없이 다투었지만, 그녀들에겐 돌봐야 할 세 아이가 있었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함께하게 된 이들. 시간이 갈수록 하들리는 생각보다 명민하게 일처리를 하는 그레이스를 신뢰하게 되고, 그레이스는 자신이 한 번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마일스 달래기’를 제대로 해내는 하들리에게 점차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프랭크의 비밀금고 속 돈은 마약 거래와 관련된 검은 돈이었고, 이로 인해 FBI의 추격을 받게 되며 이들의 도피는 예기치 못한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2022년판 델마와 루이스’라는 문구처럼 이 책의 주인공인 하들리와 그레이스 역시 FBI와 프랭크의 추적을 피해 오롯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성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을 밟아 나가며 둘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조력자이자 친구 사이가 된다. 계속되는 위기 상황에서도 둘이 의기투합해서 추적을 따돌리고 위험을 뛰어넘어 결국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하들리와 그레이스》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다시 믿음과 신뢰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찌 보면 고리타분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지만, 두 여성과 세 아이가 지닌 매력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책을 읽는 동안 다른 듯 닮은 이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힘든 여정 끝에 안정감을 되찾은 이들에게 늘 행복한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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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커빌리티
김현정 지음 / 메이트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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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초년생일 때 회사에서 만난 팀장님은 애 둘 딸린 수더분한 외모의 아줌마였다. 티셔츠에 면치마를 입고 단화를 즐겨 신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재력, 학력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사람이었다. 강남에 빌딩 여러 채 갖고 있는 우리 회사 사장님의 아내였고(!) 대대로 학자 집안에서 명문대를 다니고 박사 학위까지 있었다. 입고 다니는 옷, 들고 다니는 지갑이며 가방도 알고 보니 전부 명품이었다. 다만 누가 봐도 '나 명품이요' 하는 식으로 로고가 크게 박혀 있는 명품이 아닌, 찐 부자들만 알아보는 명품관에도 없는 리미티드 에디션이나 일반인은 잘 모르는 명품의 명품, 혹은 로고가 거의 없다시피 한 제품이었다. 그때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돈이 많았던 사람들은 늘 자기 주변에 배경처럼 있는 부를 굳이 자랑하지도 내세우지도 않는구나, 라는 걸. 그녀는 내가 《라이커빌리티》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었다.

책 제목인 라이커빌리티(Likeability)는 likeable과 ability의 합성어로, 사람들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여기서 관건은 강한 질투를 유발하지 않되 매력은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건 왜 중요할까? 사람들은 질투하는 대상의 잘못에는 오랫동안 분노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위너가 되는 셈이다.

한강이 보이는 곳에 살고 명품을 들고 입던 이른바 '영 앤 리치'였던 한 유튜버가 활동을 접는 일이 있었다. 그녀가 입고, 들고, 사용하던 물건들의 대부분은 짝퉁이었다. 한동안 관련기사로 온 세상이 시끄러웠다. 심지어 그 중 일부의 진품마저 가품으로 취급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정 기간 자숙 후 활동을 시작했지만 반응은 예전만 못하다. 왜 이렇게까지 미움을 샀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범법자를 응징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자랑하더니 가짜였네? 쌤통이다'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그녀의 실수는 엄청난 러버빌리티에 취한 나머지 이를 라이커빌리티로 낮추는 데 실패한 것에 있었다. 잘나되 잘남을 과시하지 않고 과도할 정도로 베풀어서 질투의 감정을 희석시켰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괘씸죄고, 내 불행에 그들은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박수친다는 것을 몰랐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나를 위협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 부족한 면을 드러내보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너그러워진다고 말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결점을 감추려는 본성이 있다. 나 역시 내 부족한 점을 감추고 싶어 하고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일정 부분 공감하면서도 받아들이고 실행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도와달라, 알려달라는 말이 내겐 사실 가장 어려운 말이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끙끙대고 전전긍긍하면서도 어떻게든 나 혼자 상황을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도 완벽주의에 가까운 사람이 아닌, 부족함을 스스럼없이 내보이고 기꺼이 조언을 구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라이커빌리티를 갖추려면 일단 나를 성찰하고 정진시키며 내 부족함을 드러내고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잘나되 잘남을 과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삶, 그거야말로 진정 라이커블한 삶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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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일상은 무슨 맛인가요 - 소박한 한 끼가 행복이 되는 푸드 에세이
오연서 지음 / 온더페이지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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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미식가인 브리야 사바랭은 이렇게 말했다. "니가 먹은 음식을 말해주면, 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내가 먹는 음식은 곧 내가 된다. 먹어야 살고, 살아야 먹고, 맛있게 먹기 위해 레시피를 개발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열 시간 넘게 줄을 서기도 한다. 예약은 필수다. 음식과 사람과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존재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누구나 마음 속에 소울푸드 몇 개쯤은 품고 살아간다. 어떤 음식을 떠올리면 추억까지 스르륵 풀려나오는 마법 같은 일. 누군가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래서 더 즐겁고 특별하다. 특히 셰프나 요식업 전문가의 푸드 에세이는 일부러 찾아 읽을 정도로 많이 읽었는데, 일반인의 푸드 에세이는 읽어본 적이 없었다. 주부 15년차의 푸드 에세이는 어떨까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다.

《당신의 일상은 무슨 맛인가요》는 추억속 나, 엄마인 나, 아내인 나, 작가인 나의 4개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 대부분 특별한 음식은 아니고 일상적으로 흔히 만날 수 있는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자가 나와 비슷한 또래라 그런지 추억 속 음식을 설명할 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국물 떡볶이보다는 매콤달콤한 옛날 떡볶이, 밀가루를 튀겨내 설탕을 잔뜩 묻힌 꽈배기, 마카로니 샐러드를 곁들이고 소스를 듬뿍 뿌려 낸 경양식 돈까스까지. 내 추억도 함께 방울방울 샘솟는 느낌이었다.

다만 '이런 음식은 이래서 안 먹는다(혹은 싫다)'라는 말이 꽤 자주 나오는 푸드 에세이라니, 여러모로 놀랍긴 했다. 보통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예찬, 음식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책은 본격 푸드 에세이라기보다는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에 음식 이야기를 곁들인 느낌이랄까. 더 깊숙하고 내밀한 음식 이야기가 궁금한데 챕터마다 글밥이 짧고 음식 이야기는 후루룩 빠르게 넘어가는 느낌이라 살짝 아쉬움도 있었다.

학교 마치면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먹었던 치즈밥, 떡볶이, 탕수육을 팔던 분식집. 그 골목에 같은 메뉴를 파는 분식집이 세 곳이었는데, 아직도 그 동네 사는 친구 말이 두 곳은 없어졌고 이제 한 곳만 남았다고 했다. 지금은 먼 곳으로 이사와 살고 있어 아쉬운 마음에 이 근처 즉석떡볶이집을 수소문해 찾아갔는데, 세상에 맛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반 넘게 남기고 계산을 했다. 그런데 옆 테이블 중고등학생들은 냄비 바닥까지 먹을 기세로 숟가락을 놀리는 게 아닌가! 그때 생각했다. 추억은 항상 그대로 맛있지는 않다고. 추억의 맛이 곁들여져서 특별한 것이라고. 그럼에도 추억 속 그 맛을 한번쯤 다시 느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추억을 떠올리게끔 만들어준 것만 해도 이 책은 제 역할을 충분히 다 한 것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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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마크
로저 젤라즈니 지음, 박은진 옮김 / 달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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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마크》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고속도로인 '로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로드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고, 입구와 출구, 구불구불한 길이나 갈림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로드를 따라 여행할 수 있다. 그곳이 어떤 곳이든, 어떤 시대이든 간에 말이다. 로드를 통해 먼 과거로 돌아가 이미 멸종된 공룡을 복제해와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상품을 파는 사람도 있다. 로드는 과거와 미래, 존재 여부도 불확실한 시간까지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하지만 로드의 갈림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인공인 레드 도라킨 역시 로드에서 길을 잃고 원래 들어왔던 출입구를 찾기 위해 긴 세월을 헤매고 있다. 그러던 중 레드에게 일종의 생존게임인 '블랙 데케이드'가 선언된다. 블랙 데케이드를 선언한 쪽은 적에게 아무런 경고 없이 10번의 살해 시도를 할 수 있는데, 본인이 직접 혹은 대리인을 써도 된다. 공격 시기 역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레드는 로드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대리인들과 싸우며 계속해서 출입구를 찾아다닌다. 그러면서 잃어버렸던 시간 속 진짜 자신의 모습을 퍼즐 맞추듯 점점 찾기 시작한다.

각 장의 제목은 2와 1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1 다음에 2가 아닌 2 다음에 1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1에는 주인공인 레드 도라킨의 이야기를, 2에는 다양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실 처음에 읽기 시작할 땐 등장인물이 계속 바뀌고 이야기도 산발적으로 나와 너무 헷갈려서 노트에 적으면서 읽어야 했는데, 중반 이후부터 읽는 데 서서히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출판사 서평에서 '천 피스짜리 퍼즐을 바닥에 흩뿌려 놓은 듯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가는 실험적인 SF 판타지 소설'이라고 했는데 이 표현이 정말 정확하다는 생각을 했다. 뒤로 갈수록 서서히 퍼즐이 완성되는 듯한 느낌!

처음 책을 펼쳤을 땐 말 그대로 천 피스 퍼즐을 처음 쏟아놓았을 때의 황망함이 느껴졌는데, 뒤로 갈수록 거의 완성되어 제 자리를 찾아가는 희열까지 맛볼 수 있었다. SF 판타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남들 다 보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도 안 본 1인인데, 이 책은 초반 30% 정도가 조금 어렵게 느껴져서 그렇지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읽고 나면 앞에서 왜 그랬는지 조각이 맞춰지면서 '아!' 하게 되는 신기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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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를 사랑하는 기분 - 발밑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한 곤충학자의 이야기
정부희 지음 / 동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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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에 태어난 나는 여름을 가장 좋아했다. 여름이 되면 곤충채집을 하겠다고 채집통을 크로스로 메고 잠자리채를 손에 쥔 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곤 했다. 잠자리도 잡고 매미도 잡고 메뚜기도 잡던 시절엔 곤충을 손으로 잡아서 들여다보는 게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접어드니 친구들이 곤충을 벌레로 부르고, 벌레는 소름끼치고 무서운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동조했고, 어쩌다 교실에 들어온 벌레를 휴지로 살포시 잡아 창밖으로 내보내곤 했다. 그때 나를 영웅 보듯 하던 친구들의 눈빛에 참 묘한 기분을 느꼈더랬다.

곤충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건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하고 난 뒤였다. 녹지가 많은 동네라 그런지 산책을 나서면 풀벌레 우는 소리로 여름밤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일부러 밤 늦기를 기다렸다가 자정무렵 걸으러 나가 풀벌레 소리를 음미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동물의 숲>이란 게임을 하면서 곤충에 대해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 외딴 섬에서 동물 친구들과 어울려 사는 내 캐릭터는 나무도 베고 물고기도 잡고 곤충도 잡을 수 있다. 이를 박물관에 기증해서 컬렉션을 만드는데, 내가 얼마나 잡았나 박물관에 가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일같이 게임 속에서 방울벌레며 비단벌레며 연꽃사마귀, 매미, 잠자리까지 다양한 곤충을 잡았다. 그러면서 옛 추억에 젖어드는 날이 많아졌다. 뙤약볕 아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어대던 매미 소리와, 그 사이를 분주히 뛰어다니던 나와 친구들의 모습이...그래서 어쩐지, 《벌레를 사랑하는 기분》을 꼭 읽어보고 싶었드랬다.

이 책은 곤충을 통해 아주 작은 소우주를 관찰하며 살아가는 곤충학자 정부희 박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엄마와 아내로 살다가 늦깎이 생물학과 대학원생이 되어 곤충분류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기득권에 저항하며, 여성에 대한 편견에 맞서며, 유리천장을 뚫으며 연구해 얻은 산물을 우리는 편안하게 안방에서 책으로 즐기고 있다니. 감사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는 내내 저자의 벌레를 향한 애정이 뚝뚝 묻어남을 느꼈다. 미처 몰랐던 벌레 이야기가 징그럽거나 무섭기는커녕 신기하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특히 신라시대 금관총과 황남대총 고분 속에 묻힌 왕의 부장품에서 수천 마리 비단벌레로 장식한 말안장 꾸미개가 발견되었다는 것, 게다가 이미 1500년이 지났음에도 아름다운 빛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정말 놀라웠다. 또, 해안사구에 곤충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해안사구의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의미라는 것, 매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는 건 도시의 환한 밤 때문이라는 것, 곤충들도 저마다 식물 잎을 정해놓고 먹는 '편식쟁이'라는 것 등 곤충에 대해 잘 몰랐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숨겨왔던 호기심이 마구 자극되는 느낌이었다.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으로 당장 뛰쳐나가 잎사귀를 뒤집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정도였다.

어쩌면 나도 이미 '벌레를 사랑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까진 아니어도 늦은 밤 작은 것들이 몸 떠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본 경험은 있으니까, 그러다 날이 싸늘해지면 순식간에 사라진 그 소리에 다음 해 여름이 오길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으니까. 벌레의 소식을 기다린다는 점에선 어쩌면 저자와 내가 조금은 닮아있는 것도 같다.

지구온난화로 곤충기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위기에 몰리지 않을까 두렵다는 정부희 박사. "벌레는 내 곁에 늘 공기처럼 머무르고 있어서 호불호 자체가 없다. 내게 벌레를 사랑하는 기분은 그런 기분인 것 같다."라고 무덤덤한 듯 이야기하면서도 작은 곤충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알아갈 때마다 기뻐서 박수를 칠 만큼 벌레를 사랑한 한국의 파브르! 그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질 만큼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 덕분에 창밖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여름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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