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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를 사랑하는 기분 - 발밑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한 곤충학자의 이야기
정부희 지음 / 동녘 / 2022년 6월
평점 :
초여름에 태어난 나는 여름을 가장 좋아했다. 여름이 되면 곤충채집을 하겠다고 채집통을 크로스로 메고 잠자리채를 손에 쥔 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곤 했다. 잠자리도 잡고 매미도 잡고 메뚜기도 잡던 시절엔 곤충을 손으로 잡아서 들여다보는 게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접어드니 친구들이 곤충을 벌레로 부르고, 벌레는 소름끼치고 무서운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동조했고, 어쩌다 교실에 들어온 벌레를 휴지로 살포시 잡아 창밖으로 내보내곤 했다. 그때 나를 영웅 보듯 하던 친구들의 눈빛에 참 묘한 기분을 느꼈더랬다.
곤충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건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하고 난 뒤였다. 녹지가 많은 동네라 그런지 산책을 나서면 풀벌레 우는 소리로 여름밤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일부러 밤 늦기를 기다렸다가 자정무렵 걸으러 나가 풀벌레 소리를 음미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동물의 숲>이란 게임을 하면서 곤충에 대해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 외딴 섬에서 동물 친구들과 어울려 사는 내 캐릭터는 나무도 베고 물고기도 잡고 곤충도 잡을 수 있다. 이를 박물관에 기증해서 컬렉션을 만드는데, 내가 얼마나 잡았나 박물관에 가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일같이 게임 속에서 방울벌레며 비단벌레며 연꽃사마귀, 매미, 잠자리까지 다양한 곤충을 잡았다. 그러면서 옛 추억에 젖어드는 날이 많아졌다. 뙤약볕 아래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어대던 매미 소리와, 그 사이를 분주히 뛰어다니던 나와 친구들의 모습이...그래서 어쩐지, 《벌레를 사랑하는 기분》을 꼭 읽어보고 싶었드랬다.
이 책은 곤충을 통해 아주 작은 소우주를 관찰하며 살아가는 곤충학자 정부희 박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엄마와 아내로 살다가 늦깎이 생물학과 대학원생이 되어 곤충분류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기득권에 저항하며, 여성에 대한 편견에 맞서며, 유리천장을 뚫으며 연구해 얻은 산물을 우리는 편안하게 안방에서 책으로 즐기고 있다니. 감사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는 내내 저자의 벌레를 향한 애정이 뚝뚝 묻어남을 느꼈다. 미처 몰랐던 벌레 이야기가 징그럽거나 무섭기는커녕 신기하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특히 신라시대 금관총과 황남대총 고분 속에 묻힌 왕의 부장품에서 수천 마리 비단벌레로 장식한 말안장 꾸미개가 발견되었다는 것, 게다가 이미 1500년이 지났음에도 아름다운 빛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정말 놀라웠다. 또, 해안사구에 곤충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해안사구의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의미라는 것, 매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는 건 도시의 환한 밤 때문이라는 것, 곤충들도 저마다 식물 잎을 정해놓고 먹는 '편식쟁이'라는 것 등 곤충에 대해 잘 몰랐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숨겨왔던 호기심이 마구 자극되는 느낌이었다.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으로 당장 뛰쳐나가 잎사귀를 뒤집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정도였다.
어쩌면 나도 이미 '벌레를 사랑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까진 아니어도 늦은 밤 작은 것들이 몸 떠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본 경험은 있으니까, 그러다 날이 싸늘해지면 순식간에 사라진 그 소리에 다음 해 여름이 오길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으니까. 벌레의 소식을 기다린다는 점에선 어쩌면 저자와 내가 조금은 닮아있는 것도 같다.
지구온난화로 곤충기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위기에 몰리지 않을까 두렵다는 정부희 박사. "벌레는 내 곁에 늘 공기처럼 머무르고 있어서 호불호 자체가 없다. 내게 벌레를 사랑하는 기분은 그런 기분인 것 같다."라고 무덤덤한 듯 이야기하면서도 작은 곤충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알아갈 때마다 기뻐서 박수를 칠 만큼 벌레를 사랑한 한국의 파브르! 그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질 만큼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 덕분에 창밖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여름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