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의 「과학자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손보미는 이 소설에서도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번역 문체'를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손보미의 소설에서 '번역 문체'는 읽기에 거추장스러움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녀의 '번역 문체'를 잘못된 문장 구사 능력이라 볼 수 없고, '기법' '스타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과학자의 사랑」에서는 '번역 문체'에 전기(biography)를 모방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번역 문체'를 채택함으로써 의도했던 효과를 더 밀고 나가고 있다. 

 

전기를 모방하는 형식을 통해 작가는 다중의 화자를 만들어 낸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과학자의 사랑」은 브라이언 그린 박사가 쓴 글인데, 브라이언 그린 박사는 고든의 부인이었던 비비안 스턴우드가 쓴 『위로와 정복』이라는 회고록을 인용함으로써 비비안에게 직접 이야기하도록 목소리를 부여하면서도, 비비안의 어떤 이야기를 인용할 것인지 자신이 결정함으로써 비비안의 목소리를 편집하고 있다. 한편 '번역과 정리'라는 명목으로 이런 다중의 화자의 목소리에 '역주'를 달고 '강조는 역자'라는 멘트를 달고 있는 '설치미술가이자 린디합퍼인 손보미씨'가 등장한다. 작가가 자기 자신을 허구화하고, 소설에 직접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 문체'를 하나의 스타일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문체가 만들어내는 일관된 효과 때문이다. 번역된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소설 속 현실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다. 소설 속 현실은 탈색되고 탈취된다. 독자는 번역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불러들인 '번역가'라는 화자를 품고 이야기를 읽어 나가게 되고, '번역 문체'는 독자가 이 점을 잊을 수 없도록 하는 번역가의 흔적이다. 그리고 아이러닉하게도, 몰입할 수 없는 소설 속 현실은 독자에게 쾌적한 독서의 위치를 만들어 준다. 

 

전기를 모방하는 형식은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라는 패러독스를 만들어 낸다.

 

이 소설에는 우리가 결코 읽을 수 없는 책들이 등장한다. 고든이 쓴 「맹인을 위한 푸리에 변환 활용」,「무선전력전송의 활용과 한계」를 읽을 수 없다. 비비안 스턴우드가 쓴  회고록『위로와 정복』을 읽을 수 없다. 랄프 토렌도어가 쓴 「뇌 무법자- 월터 프리먼」을 읽을 수 없다. 브라이언 그린 박사의 글이 실린 『포퓰러 사이언스』2012년 1월호 도 읽을 수 없다. 이 책들은 소설 속의 책들이기 때문에 결코 읽을 수 없는 책들이다. 한편 이 소설에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처럼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도 등장한다.

 

 

 

 

 

 

 

 

 

 

 

 

 

 

읽을 수 없는 가상의 책과 읽을 수 있는 현실의 책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다. 손보미와 스테판 슈워츠라는 현실 속 인물과 고든 굴드와 비비안 스턴우드 같은 가상의 인물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가상의 인물에 대한 전기에 실존하는 인물을 집어 넣은 셈이다. 가상화된 현실, 현실화된 가상은 전기 형식으로 인해 이 이야기를 거짓말이라고도, 거짓말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게 된다. 독자는 소설 속 현실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게 된다. 소설과 현실 사이의 균열을 품고 이야기를 읽어 나가게 된다.

 

결국, '번역 문체'와 '전기를 모방하는 형식'은 독자가 이야기에 너무 가까이 가지 못 하도록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독자가 얻은 쾌적한 독서의 위치는 '관찰자'라는 자리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등장 인물이 되지 말고, 관찰하도록. 다중의 화자를 관찰하도록.'이라는 요구를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문체와 형식이 만들어 낸 효과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독자가 소설을 관찰함으로써 삶의 진실에 다가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다'라는 패러독스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독자는 발밑에 패러독스를 두고 이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하는 문체와 형식으로 인해, 별달리 극적인 서술이 없는 이 소설을 긴장감을 가지고 읽어나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점에서 말이다.

 

 

덧) 린디합퍼는 이런 걸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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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3-04-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거하다는 말을 어느 잡지에선가 읽었어요. '어느'나 '어떤' 등이 들어가는 한정형이 아니라 과학자 전체를 지칭하는 사랑이라니. 역시 손보미는 대담해. 라고 말이죠.

손보미의 문체가 특이한 느낌은 계속 받았는데 그 이유는 딱히 몰라서 궁금한 상태로 있었어요. <폭우> 같은 단편은 기괴하다 그리고 플러스 알파도 있고 말이죠. 한걸음씩 님 표현처럼 '번역문체'에 그 답의 한 지점이 있을 거 같아요.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손보미는 계속 눈이 가는 작가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HAE 2013-04-29 13: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달사르 님.

글을 읽고 댓글까지 남겨주시다니! 고맙습니다.^^

'번역문체'는 제가 만든 표현은 아니고요, 이전에 다른 평에서 보았던 것이어요.
심사평에 보면 김화영 선생님께서도 이 표현을 쓰고 있으시고요.

손보미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제 3회 웹진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여자들의 세상>이라는 단편도
읽어 보시길요. <과학자의 사랑>이 형식과 문체면에서 흥미롭다면, <여자들의 세상>은 주제를 다루는 방식면에서
흥미롭습니다. ^-^

홍시우 2013-12-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 잘 읽었어요. 책에 대한 이해가 어려웠는데 알기 쉽게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과학자의 사랑>을 분석하고 있는데, 서평에 나와있는 부분을 조금 인용해도 될까요?

HAE 2013-12-03 00:55   좋아요 0 | URL

인용출처를 밝히신다면, 얼마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