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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만든 사람 -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강준민 지음 / 두란노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어려운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 때문에 더 비참해지곤 합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보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강준민 목사님의 책을 오랜만에 다시 대하게 되는데 이 책은 아브라함의 영성과 믿음의 발자취를 좇아가면서 그의 믿음의
근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그의 믿음이 자라가게 되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이전 책과는 다른 형식이어서
약간 어색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인물강해가 아닌 주제별로 강해한 책이 더 좋았습니다.
책을 살펴 보면서 가장 마음에 남는 단어가 '기다림'이란 단어였습니다. 아직도 이 단어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고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조급증만 아니었어도 더 큰일과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뻔 했던 사람을
종종 보게 되는데 기다림은 나를 극복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과제 중 하나임이 틀림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바라 보면서 기다림이라는 여울물로 빚어낸 가장 빛나는 믿음의 보석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이 보석을 간직한 사람은 운명이나 숙명에 얽매이지 않고 개척자의 삶을 살아가며 가장 분명한 믿음의 내용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암울한 상황을 묵묵히 인내하며 걸어갔던 것도
자신 속에 품은 '믿음의 부화'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시기별로 성경의 목차대로 그의 행적을 쫓아 가는데 아브라함의 고된 인생사와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안심이 됩니다.
니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우리도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에 한층
더 다가서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마침내 언약의 후손인 이삭을 25년 만에 얻고 승리의 깃발을 꼿고 웃음을 웃는 모습을 보면서
저 승리의 날이 내게도 임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보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물론 겉으로 드러난
사실(fact)만 기록을 하고 있지만 만약 감정적인 내면의 깊은 부분까지 우리가 알 수 있었다면 적지 않은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기다림의 현장에서, 자신을 속이는 시간에서 점차 변화되어 늘 제단을 쌓는 거룩한 생활로,믿음의
점진적인 진보를 보이는 괴정에서 또 다른 미래의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편 한편 설교를 읽는 것처럼 편하게 읽어 내려가면서 예전에 강준민 목사님의 칼럼에서 읽었던
"하나님은 물이 끓는 온도인 100프로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고는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첫 단계인 '떠나라"는 명령은 그래도 순종하기가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강도가 세져서
나증에는 급기야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그의 애간장이 녹는 심정을 헤아려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런 마지막 임계점에 도달하기까지 그는 아직까지도 진정한 믿음이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 순간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순간 순간 고비마다 '하나님의 침묵'과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기다림이 아닌 하나님의 기다림이란 사실을, 그리고 미래의 그 순간이 다가와 봐야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60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15년을 하란에서 허비하면서 공허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이 '다시 순종하고'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올해 초에 들었던 말씀 "다시 복음 앞에 서서'라는 말씀과 맞물리면서 [다시]라는 단어 앞에 멈춰 섰습니다.
'다시 복음 앞에' / 다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우리는 늘 '다시'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아직도 진행형인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리플레이 되는 이런 반복의 삶이 없었다면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너 있는 곳에서' ... 라는 창세기 13:14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선 자리에서부터 "다시"
위대한 일을 시작하심을 보게 됩니다. 축복의 시발점은 내가 선 바로 이 자리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동서남북이 축복의 땅이고 하나님이 늘 눈 여겨보시는 땅임을 망각하고 롯처럼 더 나은 것만 찾아 헤메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힘이 웃음의 시간을 갖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녀냈을까? 그도 우리처럼
흠이 있고 결점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때로 지치고 힘들어서 모든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의를 이루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우리의 반응이 결합해서 최고의 선을 이끌어 내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신 때는 이스마엘을 가진 86세를 지나서 99세에 다시 나타나시는데
이 기간이 13년입니다. 이 기간의 긴 영적인 침체기, 하나님의 침묵에도 나는 과연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쌓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글쎄'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을
바로 여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긴 침묵의 시간에도 그는 끊임없이 반응하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서 마침내 '내가 ~하리라'로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후손들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강즌민 목사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한 마디로 '고독한 순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독한 순종을 통해서
믿음의 시간을 건네 받았고 이겨 냈고 "마침내...~ 하리라는 약속을 모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간을 견뎌 낸 사람이 어디 아브라함만 있겠습니까?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다윗도, 사도바울도
모두 이런 고독한 순종의 시간을 잘 극복해서 믿음의 결승점을 뚫은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룬 결코 평범하지 않은 최고의 믿음이 모두 '고독한 순종'을 통해서 이뤄진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이 받은 축복을 부러워 하기 전에 이런 고독한 순종의 시간을 받아 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에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있지만 아브라함만큼 우리에게 믿음의 표본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따르고 본 받아야 할 많은 믿음의 본 중에서 한 가지 만이라도 실천하리라 다짐하고 쫓아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