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그르니에 서한집 1932~1960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지금 제겐 정말이지 꼭 한 가지 야심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이지요.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하게 말입니다. (p. 26 카뮈)

 

열정을 다하여 산다고 하셨던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저를 추동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제시할 수 있는 하나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목표, 하나의 극단적인 경우일 뿐입니다. 니체는 거기서 광기를 만납니다. (p. 98 카뮈)

 

편지 혹은 전보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는 것. 때로는 엇갈리기도 하고 긴 시간 답장을 기다린다는 것.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다림이다. 하물며 요즘은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하고서도 오는 동안 어디쯤인지 몇 시에 도착하는지 또 혼잡한 곳에서는 어디 있는지 쉴 새 없이 연락한다. 가끔은 그런 것이 신물 날 때도 있다. 어릴 적만 해도 친한 친구와 주고 받았던 편지나 쪽지가 수십 통 어쩌면 수백 통일 수도 있다. 손글씨가 그립다. 그리고 불과 몇 십 년 전의 몇 일 혹은 몇 주 간 답장을 기다리는 일상이 그리워 질 때도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모든 것을 거리낌없이 말 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음이, 그들 스승과 제자 혹은 문우 간의 우정 깊은 편지로의 대화가 그저 부럽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235통에 이른다. 카뮈가 112, 그르니에가 123통의 편지를 써 보냈다. (p. 13 책 머리에)

 

귀중한 친구이신 그르니에 선생님, 이제 와서 새삼스레 제가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은 자신을 키워주고 이끌어주신 분들에게는 감사의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저 계속 그 모습 그대로 계셔달라고 부탁할 뿐이지요. 부디 저에 대한 선생님의 우정을 간직해주십시오. 그것은 제 삶과 제 노력을 위하여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제자로서는 불안스러운 저를, 그리고 친구로서는 낙관적인 저를 믿어주십시오. (p. 285 카뮈)

 

내가 이 책을 궁금해 한 건 물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란 작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옮긴이(번역가) 김화영 교수의 덕분이다. (아쉽게도 장 그르니에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ㅜㅜ) 우리나라에서 카뮈의 번역도서를 접해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카뮈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우리나라에서 알베르 카뮈란 작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꼽는다면 1위를 선뜻 내어줄 김화영 교수.

뭇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노라면 프랑스 남부지역 특유의 프로방스의 빛과 풍경이 느껴진다고 한다. ‘태양과 지중해의 작가카뮈 역시 어느 장소에 머물든 그리워하던 곳. 따뜻한 햇살과 온화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지 없이 화창하여 우울증을 앓던 이도 며칠이면 호전될 것만 같은 행복한 날씨. 문학동네 카페에서 <너무 짧았던 여름의 빛> <목신을 찾아서>를 연재하며 카뮈가 머물던 장소를 비롯한 프랑스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도 한다.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펴 들고 처음 마주하는 글 또한 옮긴이 서문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머리에 부쳐. 책을 출간하며 또다시 프로방스를 방문하여 서한집에 나오는 마을을 찾기도 하고 카뮈의 딸 카트린 카뮈를 만난 시간이 쓰여있다.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우정에서 큰 행복을 느껴요. 당신의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맛보았던 감탄의 느낌이 날로 커져가는 것에 더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 자신에 대한 깊은 존경의 마음이 합해집니다. 전에는 당신이 유아독존의 바리새인처럼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빠른 속도로 젊은이 특유의 오만에서 벗어났고, 그리하여 진정한 위대함에 도달했어요. 당신은 이미 위대한 재능을 타고났었고 또 엄청난 장애물들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러한 재능과 그 장애물들에 상응하는모습을 보여주었어요. 그런 재능을 타고나서 그런 장애물들을 만난 경우는 더욱 드문 일입니다. (p. 270 그르니에)

 

선생님께서는 솔직히 제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주 불안한 심정으로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 저의 삶에 순수한 것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p. 46 카뮈)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을 읽으며 먼저 든 생각은 두서 없다는 것이다. 둘만 아는 이야기를 엿본다는 것, 게다가 흥미진진 로맨스나 고백도 아닌 그저 스승과 제자 혹은 문우(文友) 간의 사소한 편지를 엿본다는 것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비단 당사자가 그르니에-카뮈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카뮈-그르니에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흥미롭지 않은 사소한 것들도 흥미로울 수 밖에 없나 보다. 글쓰기에 관한 근원적 고민 외에도 읽는 책, 건강에 관한 이야기(카뮈의 폐결핵), 가족사, , 불안정한 공간, 공산당 입당 권유, 식량요청, 유럽, 남미 여행, 철학교사, 강연, 직업적 연극 배우, 회곡 작업, 신문기자 등 일상을 주고 받으며 1932~1960년 무려 28년 간 주고 받은 편지들이다. 전화가 보편화되지 않은 80여 년 전 카뮈-그르니에의 편지, 엽서 때로는 전보를 읽는 다는 것은 어쩐지 그들과 가까워지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더 작품이 궁금해 지기도 한다.

 

 

 

게다가 저는 요즈음 아주 이상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무감각이라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고 이 병이 오래가는 것이라면 그건 지옥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얌전한 회의주의자이므로 치유와 은혜와 맑은 이슬을 기다리면서 선생님에 대한 사랑으로 알렉상드르 뒤마를 읽고 있습니다. (p. 332 카뮈)

 

제가 생각하는 바를 선생님께 제대로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그러나 적어도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이 광란 속에서 제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붙잡고 있기로 결심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너무나 많은 가치들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 최소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가치들만이라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p. 61-62 카뮈)

 

카뮈 17세에 처음 만난 그들은 처음에는 스승과 제자로,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편지는 마음이 잘 통하는 벗으로서 때로는 서로의 조언자로서 마음을 나눈다. 서로에게 카뮈의 저서 <안과 겉>, <반항하는 인간>, 그리고 그르니에의 <모래톱>을 헌정했다. 그리고 서로의 작품을 굉장히 사랑했다. 카뮈는 심지어 그르니에의 <섬>을 서른번도 넘게 읽었다!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작품을 생산한 데는 당시 척박한 환경이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40년대 전쟁(2차 세계대전), 식량조차 부족한 그 광란의 틈바구니에서 거의 항상 재미없는 따분한 일상 속 폐결핵까지 앓은 카뮈는 많은 시간 회복을 위해 그저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글에 관한 신념과 결단력으로 이미 출간한 작품을 몇 년 간 고치며 작품의 완성에 공을 들였다.

 

 

 

우리는 항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번도 나와는 무관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생각도, 당신의 고독도. 유람스럽게도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이기적이었고 몰이해했습니다. 인간들이 서로 갈라지는 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한계에 또다른 한계들을 덧보태기 때문이고, 자기 속에 웅크린 채 편협해져서 남이 뚫고 들어올 자리를 남겨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영에 찬 자기만족으로 보여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는 자연스레 자신을 내맡겨놓을 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p. 144 그르니에)

 

이처럼 고전이 훌륭한 것은 당시 환경에서 기여된 것이 아닐까. 현대는 할 것,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고 TV며 컴퓨터며 스마트폰까지. 당최 인간이 생각할 시간과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그저 멍하니 받아들일 뿐이다. 혹자는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제발 생각할 시간을 좀 가지라며 생각 없이 빠르기만 한 현대인을 비판했다. 생각. 나 자신에 대해, 나의 시간들에 대해, 미래에 대해, 혹은 어느 하나에 대한 곰곰한 생각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오늘 단 한 시간만이라도 오롯이 생각하였는가?

 

제겐 빵만큼이나 고독이 필요했습니다. 아니, 차라리 고독은 제 개인적인 작업의 길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방책이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방책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은 더 이상 제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미신일지 모르지만 그 이야기는 안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p. 352 카뮈)

 

나는 작년에 노자의 책들을 읽었어요. 도가道家의 세계는 대단한 것입니다. <선택>의 후편-‘무위無爲’-을 쓸 때는 거기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동방사상은 유럽의 깊고 비극적인 허무주의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당신은 그걸 밀도 있게 표현하고 있어요. 그의 말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피츠제럴드가 그랬듯이 고독 속에서 낭비하는 한순간이랄까요! (p. 126 그르니에)

 

끝에 가서 제자가 스승을 떠나 자신의 독자적이고 다른 세계를 완성하게 될 때-실제에 있어서 제자는 언제나 자신이 모든 것을 얻어 가지기만 할 뿐 그 어느 것 하나 보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그 시절에 대하여 변함없는 향수를 가지네 될 것이면서도-스승은 흐뭇해한다.” 장 그르니에 <알베르 카뮈의 서문 (p. 445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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