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홀수다
김별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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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지어 밥을 떠서 밥을 먹을 때, 삶은 비로소 뜨거워진다.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지어 누군가를 위해 밥을 떠서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을 때, 존비와 보상의 경계는 까무룩 사라진다. 먼 곳에서 떠돌던 햇살의 시간, 바람의 시간, 비와 풀벌레와 거름이 썩어가는 시간이 내 배 속에 그득하다. 그리움의 시간, 외로움의 시간, 홀로 거리를 헤매던 방황의 시간을 연민과 안도감으로 소화한다.

아아, 잘 먹었다! (p. 27)

 

김별아 작가의 이름은 자주 접했지만 막상 읽은 책은 없다.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미실>이란 소설을 알고 있었지만 <삶은 홀수다> 이번 산문집이 내겐 김별아 작가에 대한 첫인상이다. 그녀의 첫인상은 참 좋다. 말하자면 운동권이란 80년대 이야기를 다루던 초기 공지영, 신경숙 작가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하고 낯선 단어들 틈바구니에서 어쩌면 故박완서 작가의 다채로운 순한글 단어들이 떠오르며 일순간 흐뭇하기도 했다.

 

방사능에 오염된 하늘에도, 죄 없는 소와 돼지가 생매장된 땅에도, 봄은 온다. 오고야 만다. 그리하여 분노와 슬픔을 다독이려는 듯 꽃이 핀다. 별꽃처럼 피어 난분분하다. … 햇살이 눈부시다. 젊은 다산(茶山)이 마음 맞는 벗들과 결성한 죽란시사(竹欄時仕)’처럼 꽃이 피었으니 한번 모이자고 소식이나 띄워볼까? (p. 136)

 

  

<삶은 홀수다>는 '어섯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기록들'이란 제목의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2008년 여름부터 4년 동안 <한겨레> 및 다른 신문 칼럼으로 게재되었던 글 모음이다. 신문 칼럼의 특성 상 시대상황이나 이슈가 소재로 다뤄진 부분이 있고 당연히 작가 개인적인 소재도 있다. '세상은 이미 충분히 수다스럽다'고 생각하는 작가이지만 그녀와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뭐든 성향이 유사한 독자라면 충분히 사랑할 만한 책이다. 바로 나처럼.

 

삶은 어차피 홀수이다.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 그 사실에 새삼 놀라거나 쓸쓸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가장 좋은 벗이 되어 충만한 자유로움을 흠뻑 즐길 수 있다면, 홀로 있을지언정 더 이상 외톨이는 아닐 테니까. (p. 17)

 

어려서부터 어둡고 소심한 혼자로 심지어 소아우울증을 앓기도 했고, 청소년기에는 문학병을 앓은 이력이 있는 그녀는 이 책을 통해 '홀로 있는 것'의 기쁨을 증명한다. 마흔이 넘어서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준 엄마와 아버지께 -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라고 글로 고백할 만큼 진심의 감정표현에 서툰 그녀가 책으로 유쾌하고 깔끔한 생각을 정리해주어 독자로서 고맙게 생각한다.

 

어느 야물고 깔끔한 이의 글에서, 외출할 때마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속옷을 신경 써 갈아입는다는 대목을 읽었다. 그러한 만약이 언제 어떻게 닥칠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낡아 구멍이 난 속옷보다 무심히 남긴 마지막말들이다.

행여 미안해라는 말이 아닌 그만해라는 말을 남기지는 않을는지,

행여 고마워라는 말이 아닌 빨리해라는 말을 남기지는 않을는지,

행여 사랑해라는 말이 아닌 공부해라는 말을 남기지는 않을는지.

정말 두려운 것은 남아 있는 부끄러움보다 남기지 못한 용서와 감사와 사랑이다. 그 세 마디 말밖에는 더 남길 것도, 가져갈 것도 없으리니. (p. 22)

 

 

책을 읽다 보면 '언제까지고 성실한 학생으로 사는 것이 그녀의 가장 나종 지니인 소원'답게 작가로서 여름에는 대작을, 겨울에는 고전을 탐닉하며 인생을 열심히 배우는 태가 확연하게 난다. 고전 이를 테면 노자의 말과 공자의 논어를 자주 인용하고, T.S. 엘리엇이나 고리끼 선생의 '소설은 곧 인간학'이라는 둥 동서양을 불문한 작가도 그녀의 생각표현에 적절하게 쓰였다.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위로받는다. 아픈 만큼 성숙하고, 깊은 만큼 높아지고, 고통만큼 언젠가 행복해지길. 지금 심연에 갇혀 허우적대는 우리, 99퍼센트에게 그보다 더 큰 격려는 없다. (p. 75)

 

누군가는 '좌빨(좌파 빨갱이)'이라고 단정 짓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파(自派)' 작가로 규정 짓는 그녀는 대중적으로 본다면 진보성향에 가깝다. 나 역시 들끓는 대한민국 이십대 청년으로서 책 속 그녀의 사회 정치적 생각을 읽으며 일정 부분 통쾌했다. 특히 2부에서는 소설가이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운동권에서 열렬히 활동하고 있는 박래군, 혼자의 생각을 고수하며 십 년째 아름다운 가사로 노래하고 있는 가수 강허달림, 무기징역수였다 소설가 혹은 번역가로 활동하던 필명 김백리의 故김은숙, 소외 받는 이웃의 옆에서 글 쓰는 시인 송경동 등 그녀 주변 아름다운 인물들에 대해 소개한다. 또 3부에서는 엄마로서 그녀의 개인적인 혹은 우리 사회 공동의 이야기를 말하기도 하고 후배들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나는 아이로 인해 내가 얼마나 모성애가 강하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인가를 확인했다기보다, 아이를 통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인가를 깨달았다. 아이는 시시때때로 나를 시험에 들게 했고, 나는 지면서 배웠다. 그것은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 기꺼이 지기 위해 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p. 158)

 

 

'시가 천상의 예술이라면 소설은 천민의 예술'이라는 김별아 작가의 소설 작업에 대한 고통과 그것을 뛰어넘는 열망에 대해 마음 깊이 공감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독자로서 그녀의 산문에 여지 없이 반했고 새해의 독서계획에 그녀의 소설도 포함시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故박완서 선생님에 대한 글이 단박에 좋았다. 아래에 일부 소개한다.

인용구가 긴 것은 이를 테면 이 글을 읽어주시는 당신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 많은 것이라고 여겨주시면 좋겠다.

 

영정 속의 선생은 생전처럼 조쌀하고 숫접은 모습으로 웃고 계셨다. 가난한 문인들에게는 부의금을 받지 말고 대접하라는 유지를 기억해 선생께 마지막으로 얻어먹는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문득 지금껏 한 번도 문인들의 장례식에서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분루를 삼키지 않는 한 좀처럼 울지 않는 건 냉심한 성정 탓인지 모르겠지만, 같은 운명에 매였던 이들과의 이별은 단순히 슬픔이나 아쉬움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글쟁이의 삶은 고단하다. 운이 좋아 살아생전에 재능과 노고를 인정받은 이나 불운하여 보상도 받지 못한 이나, ‘필승을 외치며 폭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필패할 수밖에 없는 문학을, 예술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하나같이 외롭고 가난하다. ‘재수 없으면 100이라는 저주 어린 축복의 말이 유행하는 고령화 사회에서도 소설가들의 평균 수명은 64, 시인들은 한술 더 떠서 62세란다. 기진맥진한 듯 부랴부랴 떠나는 돌연한 영이별도 서럽지만, 부음이 들린 바로 그날 대형서점에서 설치한 박완서 특별전매대에서 평소보다 몇 배의 책이 팔렸느니 어쨌느니 하는 뉴스는 기막히다 못해 역겹다. 왜 작가가 살아 있을 때는 읽지 않던 책이 죽었다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는가? 박완서 선생이 그 천박하디천박한 생난리를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p. 150-151)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속이 되어야 한다.

정호승의 산문 <>(<정호승의 위안>, 열림원, 2003)의 일절을 가만히 되뇐다. 인간이라는 아름답고도 끔찍하며, 위대하고도 초라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빈손이 필요하다. 오직 그러한 인간을 재료이자 과제로 삼는 작가라는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빈손이 절실하다. 빈손은 현실을 재단하지 않는다.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 소유의 움켜잡음을 위해 헛손질을 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자파인 작가로 살기에 이렇게 텅 빈 채로 충만하다. (p. 214)

 

상처만큼만 넓어지는 세상 속으로 이제 막 첫발을 내딛는 후배들에게, 나는 오직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한다. 여태껏 받아들과 한숨짓던 성적표의 등수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길. 지금은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로 행복은 성적순일 수 없다. 진짜 공부-세상 공부, 사람 공부, 인생 공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허용되어 마땅한 지적 허영과 권장되어 마땅한 체험에 대한 탐욕으로 한껏 들썽들썽 걸신스럽게 공부해야 한다. 부디 그 큰 배움터에서 용맹 정진하기를! (p.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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