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1825일의 기록 - 이동근 여행에세이
이동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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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글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할 때가 있다.

내 여행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며,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본 것들을 당신이 본다고 하여,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없다. 나에겐 의미인데 당신에겐 하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것들을 세심하게 바라보는 여유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의 여행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p. 163 scene #36. 당신이 남기고 가는 것들)

 

당신과 인연을 맺고 싶어요. 당신이 제게 다가와 주길 기다리기보다 제가 먼저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볼 생각이에요. 제가 당신에게 내민 손이 조금 떨리네요. 제 용기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죠?

(p. 160 scene #35. 매일 그대와)

 

 

이동근의 여행 에세이인 <너 1825일의 기록>은 여느 여행기와 다름없이 한결같이 아름답다.

 

시와 산문의 중간 그 어디쯤이라고 할 수 있겠는 이 책은 아시다시피 텍스트가 적고 사진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마음먹기에 따라 금세 휘리릭 다 읽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읽는다면 자고로 천천히 충분한 시간을 들여 문장을 음미하고 곱씹으며 나의 그리운 어떤 생각들과 함께 감수성을 채워나가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몸서리치게 외로운 독자가 이 책을 만난다면 비슷한 처지의 작가로부터 공감 가능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한편으로는 꾹꾹 눌러 담고만 있었던 그리움이 폭발하여 눈물샘이 터질 수도 있겠다. 나로 말하자면 때때로 나의 그리운 시간과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지난 여름 혼자 떠난 여행을 추억하며 공감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몸서리치게 외롭진 않아서 눈물이 맺히진 않았다. 조금 더 후하게 수식하자면, 이동률 시인의 여행에세이 <끌림> 혹은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와 비슷한 류의 책이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아픈 기억을 가진 공황장애를 앓기도 했던 평범치 않은 작가가 5년이란 시간동안 골목으로 떠난 여행기이다. 사랑에는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듯이, 나의 마음에도 절망과 희망이 공존했습니다. (p. 15) 누군가, 아마도 사랑했던 사람을 내려놓기 위해 떠난 쓸쓸한 여행길에서 작가는 더 쓸쓸한 이웃들의 생활을 엿보았고 때로는 공감했고 또 때로는 그들에 동화되었다. 그토록 감성적이므로 이렇게 진한 감성 돋는 에세이를 낼 수 있었으리라. 

 

나는 가끔 새벽 4시 커피 한 잔을 들고, 사람들이 모두 잠든 그 정적인 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차림과 양쪽 귀를 음악으로 감싼 채 동네를 서성거린다. …

하루 중 가장 밤이 깊은 시간 새벽 4, 슬픔에 잠겨 우는 사람도 없을 테고, 기쁨에 겨워 웃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p. 70 scene #14. 외로운 밤, 새벽 4)

 

골목도 그냥 골목이 아니라 재개발제한 구역 혹은 재개발이라는 명목의 벽화마을, 꼬불꼬불 버스를 타고 가다 마음에 드는 시골, 노인의 고독이 자리잡은 골목, 그리고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모여든 곳 이를테면 부산 영도다리와 사십계단 같은 오래된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곳이다.

아이들이 가난한 마음을 안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p. 79 scene #16. 우연한 조우)

 

동네 주민들에게는 일상의 생활 공간인 골목이 여행가인 작가에게는 특별하게 보였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것들을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 그것이 여행임을 작가는 책 전반을 통해 어쩌면 여행을 꿈꾸고 있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보통의 단어도 일상의 글자도 유달리 멋있게 보이는 것은 여행지에서의 기록이라서일까?

 

고민이 어떤 것이 되었든, 그 무게는 결코 자신에게는 가벼울 수가 없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하는 고민이라고 어떻게 하찮은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p. 60 scene #12. 나의 슬픔에 관대하지도 못하면서)

 

책이 중간을 지나면서 꼭 여행지에서의 기록이 아닌 어릴 적 추억 혹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도 함께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5학년 때 첫 헤어짐을 겪었던 슬픔. 나 역시 5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되어 헤어짐을 겪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되게 우스운 게 바로 옆 학교로의 전학이었다. 단짝과 이별선물을 나누기도 했는데 중학교 때 다시 만났었다. 다단계의 추억. 나도 이럴 뻔 했던 기막힌 추억이 있다. 다단계에 빠져 온갖 친구들에게 취업시켜주겠다며 연락하던 예뻤던 그 아이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친구들이 그게 다단계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도리어 화를 내며 듣지 않았지만 설마 여전히 그 곳에 있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나의 '쫄깃쎈타'를 떠올리게 하는 게스트하우스의 추억. 나 또한 다음 여행에는 엽서세트를 가지고 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짧은 마음 표현을 해 보리라.

세계의 모든 여행자들이 함께 하루를 쉬어 가는 자리, 오늘 이 방에 함께 머무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한다. 2층 침대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지금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한 엽서세트를 꺼냈다. 첫 문장은 ‘DEAR’보다는 ..라는 말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낯선 곳으로 떠나오니, 문득 네 생각이 나서 몇 글자 적어 본다.

(p. 241 scene #55. 게스트하우스에서 쓰는 엽서)

 

사람이 그리우면 마음껏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여행이 필요하다면 하늘을 한번 쳐다보며 카메라의 셔터를 아끼지 않길 부탁한다. 먼 훗날 당신이 남긴 모든 기록들은 10년 후, 우연히 당신과 다시 조우하게 되는 순간 눈물이 날 만큼 애틋한 의 흔적이자 역사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 343 그리고 끝나지 않은 이야기)

 

사실 <너 1825의 기록>에서의 '너'는 '나'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나, 그 시간 속의 나, 지금은 그리워져버린 그 때의 나. 혼자 떠나는 여행의 동반책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잠들지 않는 새벽, 감수성이 터질 듯 풍부한 시간, 뭔가를 끄적이고 싶은 시간에도 함께하면 좋을 책이다.

끝으로 이 책에는 작가에게 여행의 동반자였던 당신과 여행을 위한 노래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나는 혼자서 무언가를 제법 잘하는 사람이다. 처음은 겁이 났지만 살아갈수록 나는 그렇다는 믿음이 강해지고 있다. 내년에도 혼자 떠나는 여행을 할 것이고 나중에도 시간을 내어 꼭 그러고 싶다.

그리고 지금도, 혼자서 잘 해내야 겠다.

 

무언가를 꼭 어딘가에 흘려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꾸만 멈칫하게 됩니다. 하지만 골목을 향한 발걸음이 있었기에 나는 하루를 열심히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신선하게 불어오는 골목바람과 음악에 비루한 마음을 의지하며 무사히 모든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1825일의 순간이 만든 찰나의 기록이 내게 남았습니다. (p. 13)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지고 편해졌습니다. 대학 진학률이 80퍼센트가 넘습니다. 그런데 한해에 평균 200~300명의 대학생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몇 백만에 달하는 청년실업률을 뚫고 취직을 해도 학자금대출 몇 천만 원의 빚을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당신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나요? (p. 308 scene #72. 내가 잃고 그대가 잃어 가는 것)

 

그냥 생각이 나서

우리가 서로에게 가벼운 안부를 건넬 수 있을 만큼 편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어.

예전에 네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문득 네 생각이 났어.

나는 왜 네가 원한 대답을 알면서도 말해 주지 않았는지 후회가 돼.

길을 걷다 너와 닮은 사람을 보고 흠칫,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어.

후회보다는 미련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걸.

그래서 비슷한 상황들에 생각이 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걸.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들 그런 거니까.

(p. 336 scene #79. 생각이 나서)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했다.

끊임없이 걷다 보니 말로 꺼내지 못한 너를 향한 아쉬움과 미련들을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한다.

그리고 꼭 한번은 진심을 담아 해주고 싶었던 한마디 나는 너를 온몸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하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안 되는 일인지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묻어두고 살아갑니다. (p. 220 scene #50. Sentimental Scen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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