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백영옥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때때로 발음하기조차 힘든 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고,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건 마음속 깊숙이 잠겨 있는 나의 진짜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아닐까. (p.139)

 

 

"저는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

백영옥 작가가 들려주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청춘이야기.

혹은 13년간 신춘문예 낙방에서 시작되는 실패이야기.

그래서 그녀의 진짜 이야기.

 

소설가 김연수가 김천의 빵집 아들이라는 얘기로 시작하여 '단지 바다에 파도가 치듯이, 삶이란 바다에 연애란 파도가 끝도 없이 몰아치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라고 말하는 부분에선 김연수 작가의 최근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떠올리게 하는 오마주인가 싶었다. 실제로 그들은 가까운 사이같았다. 

우연찮게도 지난 여름 참석한 어느 문학캠프에서 첫째날에는 김연수 작가, 둘째날엔 백영옥 작가를 비롯한 여성 작가들과 만남의 자리가 있었다. <곧, 어른이 시간이 시작된다>를 읽으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청춘을 말하던 작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청춘은 실패의 연대기라며 직전 인터뷰에서 청춘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작가들 하나같이 손사레를 쳤단 이야기.

 

오늘 28세를 살고 있는 나의 청춘과 굉장히 부합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수만번 공감했고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섭게 메모해야 했으며, 그녀의 탐나는 경험을 위시리스트에 담으며 바쁘고 빠르게, 그러나 마음은 평온하게 책을 읽어 나갔다.

나의 실패가 나만의 실패가 아니며 성공에는 교훈이 있지만 실패에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자기 위로의 문구를 발견한 기쁨과 함께. 이를테면 내가 20대와 30대에 걸쳐 쓴 인생의 오답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세상엔 죽도록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꿈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좌절되고 만다.’ (p.318)

나는 아침엔 부화뇌동, 밤엔 전전긍긍 사이를 오가며 방황했다. 섣부른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쉽게 절망에 빠졌다. (p.71) 꼭 나의 마음 같은 그녀의 이야기.

 

 

소설이 아닌 그녀의 진짜 이야기답게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 작가, 물건, 장소, 혹은 그리운 사람, 시간, 장소 등 참 많은 이야기들이 그녀의 맛깔나는 문체로 쓰여졌다.

그리운 사람 최진실에게 알뜰히 영덕 게의 살을 발라주며 소주 한잔 기울이고 싶다는 이야기,

오픈 유어 아이즈, 이동우가 슬픔을 눈물이 아닌 미소로 표현해내는 이야기,

여행을 가고 싶을 때는 윤대녕 작가의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

1995 6 29일 목요일 오후 5 55분, 삼풍백화점과 함께 삭제당한 스물 몇 살의 이야기,

젊은 날 잃어버린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묻은 경주,

영화 <봄날은 간다> <북촌방향> <건축학개론> <고양이를 부탁해> <사랑니> <와니와 준하> <멋진 하루> <8월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삼청동'을 비롯한 여러 노래들.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대중적인 소재들이 그녀의 손 끝에서 감성을 툭 건드리는 공감의 힘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 

 

하물며 누구나 가지고 있음직한 아픈 첫사랑 이야기를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내 첫사랑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스무 살, 소설 창작 수업을 듣는 다른 과 선배를 좋아해서 고백했는데 거절당했다’. 조금 덧붙이자면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다가고백했는데 한마디로 거절당했다는 것이다(p.89) 

 

만약 누군가의 말에 깊게 베어 상처 받았다면, 상처 때문에 숨 쉬기가 힘들어 걸을 수 없다면, 길을 걷는데도 시간이 정지한 듯 거리의 풍경이 돌연 멈춰 선다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들끓는 대낮 도로에서 울음을 삼켰다면, 당신은 경주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p. 105)

이 부분를 읽고 나는 경주를 사랑하게 됐고,

 

문득 생각지도 못한 통증이 늑골 깊숙이 살아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면서.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흐르는 봄 햇살, 아기 고양이의 등허리 같은 아지랑이, 가볍게 뺨을 스치는 부드럽고 나른한 바람 아래로 흐르는 첫사랑의 얼굴. 문득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제야 봄이 왔음을 알게 되는 순간. (p.87)

이 부분을 읽고 다시금 온전히 느껴보기 위해 봄을 기다리게 됐고,

 

고전은 지독하게 어렵고 읽기 힘들다. 고전 읽기엔 상당한 유혹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다. 톰 울프, 스티븐 킹 같은 최고의 영미권 작가 125명이 꼽은 최고의 소설 1위 역시 《안나 카레니나》다. 13년간 신춘문예를 낙방했던 내가 거짓말처럼 등단한 건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난 직후였다, 라고. (p.218)

특히 이 부분을 읽고 《안나 카레니나》를 꼭 읽어야지 다짐하게 됐다!!

 

 

인생을 몇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자면 나의 리브로 시절은 혜화동 시절이다. 1980년대의 감수성을 대표하는 그룹 동물원의 <혜화동>. 작사에 작곡, 노래까지 부른 김창기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느덧 10년도 훌쩍 넘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지하철을 타고 혜화역에 내려 빨간색 소방차가 보이던 소방서를 지나치던 시절, 소설가 김중혁이 김중혁 과장이고, 시인 강정이 강정 대리이던 시절로. (p.54)

 

이렇게 그리운 시간들을 거쳐 실패 연대기의 청춘을 지나온 그녀의 글을 읽고 무수한 자기계발서 혹은 심리분야의 책보다 훨씬 큰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나에게도 곧, 어른이 시간이 시작된다...될 것이라는 느낌!

 

 

한국처럼 힐링이 필요한 사회도 없다. 만약 누군가 서울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불안이라고 말하겠다. 외국인들에게 물어보시라. 한국 사람들은 참 급하다. 뛰듯이 걷고 달리듯이 먹는다. (P.61-62)

 

 

보인다고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세상엔 눈을 부릅뜨고 온 마음을 기울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하면

 

곧, 어른이 시간이 시작된다.

  

 

*오탈자

218 5번째줄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게으른 ~ -> 노동자를 착취하는 게으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