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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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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독일어 학습사전
신형욱 엮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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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9월 12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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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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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덥지근한 날씨에 방안에 널어놓은 빨래들이 축 처져있다. 모기들마저도 무겁게 날다 내 매정한 손바닥에 부딪쳐 떨어진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앞이마가 유난히 무겁다. 삐질삐질 흐르는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에 온갖 먼지들이 달라붙기라도 한 것인 냥, 온 몸이 무겁다.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때는 이처럼 무거움, 나를 끌어내리는 무언가가 강렬할 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탈을 꿈꾸었다.

일상의 굴레를 벗고 날아오르는 꿈... 하지만 끈적끈적한 욕망의 몸을 가지고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회의 또한 만만치가 않다. 자유라는 것은 한계지어졌을 때만 의미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달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면 그림자가 너무 길다...' 사월 어느 날 밤에 수첩에다 적었던 글귀인데, <달과 6펜스>라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떠올랐다. 자다가 깨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서늘한 달빛을 온몸으로 맞을 때, 차고 기울어지기를 반복하는, 늘 죽어가고 그럼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달을 떠올릴 때, 그것은 신비한 여신이고 영원불멸한 꿈일 것이다. 그런 달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 가득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쭉 뻗은 길을 달리게 될 수도 있겠다. 그 때 짤랑거리는 금속성 소리가 주머니 속에서 적막한 공기 중으로 튀어나온다면? 그것이 몇 개의, 달과 같은 은백색의 둥근 동전들 때문이라면?

그리고 달을 향해 난 길에 멈춰 서서 등뒤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면? 그래도 이륙을 믿고 뛸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에 묶여있는 현실에서 잡을 수 있는 달이란 6펜스임을 인정할 것인가? 이처럼 <달과 6펜스>에서는 이상과 현실, 정신과 육체가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머셋 몸이 이 책 곳곳에서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하듯, 인간의 삶이란 미묘하고 모순된 것이다. 그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일상이란 무의미하고 뜨거운 정열과 모험이 있는 삶만이 가치있다고 말하려고 했을까?

오히려 일상 속에서, 무의미한 것을 의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삶에 이끌리지 말고 그것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 예술가의 삶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찰스 스트릭랜드가 예술가이고 천재이며 악마적인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는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40이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을 향해 나아갔던 그 모습에, 우리는 너무도 일찍 젊음과 꿈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지금 이 상태로 머물도록 잡아끈다. 어떤 이는 스트릭랜드 부인처럼 물질에 대한 허영심이나 남들의 이목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짓도록 내버려둔다.

블랑슈 스트로브가 그랬듯이,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 심지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몸과 마음은 끈적거리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러한 욕망들, 나를 구속하는 무거운 그림자에 분노한다. 스트릭랜드가 '안일한 행복'으로부터 뛰쳐나와 무한한 꿈으로 나아간 것처럼 나도 욕망을 벗어버리고 보다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도 많다. 하지만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살갗을 맞대고 사는 삶, 평범한 삶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세속에 대한 욕망과 이상에 대한 욕망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욕망이 갈등을 일으키고 서로 시소놀이를 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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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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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윌슨의 「사회생물학 : 새로운 종합」은 나오자마자 '과학의 탈을 쓴 현대판 우생학', ' 남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이론'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고 한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책「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윌슨은 행동에 인종적 차이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인간을 생물학적 종이라는 자리에 우면 집단들이 어느 정도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는가 하면, 남녀의 유전적 차이로 인해 남성은 공격적이고 성급할수록, 여성은 수줍고 주저할수록 유리하게끔 진화되어온 것이며 이를 토대로 성적 분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그가 일단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사회적 행동양식이 어떻게 발달했고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던 것이지 결코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목표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워낙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발은 당연히 예상했어야 했다.

그 밖에 윌슨의 견해를 비롯한 사회생물학이 사회·문화적 과정들을 오직 유전자의 원리로만 설명하려고 할 때 환원주의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사회생물학자들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지만 윌슨은, 생물의 사회적 행동은 기본적으로 유전자의 지배를 받지만 환경이나 문화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편 그는 과학적 유물론의 우월성을 역설하며 현대 사회의 새로운 신화는 이에 바탕을 둔 진화적 서사시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한다. 물론 환원주의는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원주의적 접근 방식이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생명현상의 종합적인 이해를 간과하여 생명의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윌슨의 사회생물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시각이 있지만 내 입장을 정리하는 것은 아직 무리인 듯 싶다. 유전자 결정론의 환원주의적 시각을 무조건 비판해서도 안되겠지만,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많고, 인종차별에서 나아가 유전자 불평등까지도 유도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시각에 대해 더욱 철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겠다는 중립적 평가 정도로 해 둔다. 사실, 지금으로선 이 책을 통해서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할 지 모른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기존의 철학적, 사회과학적이 아닌 생물학적 접근 방법이라는 미처 몰랐던 가능성과 마주치게 되어서 더욱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고.

사회생물학자들의 주장이 사실이어서, 생명의 주체가 유전자이고, 인간도 '이기적인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프로그램된 로봇 전달자'라는 것이 '진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한계로 인식하는 단계에까지 왔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더욱이 한계가 있기에 자유롭고 싶은 것 아닌가. 검증 가능한 과학적 추론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인간의 본성이 아닐는지. 지금은 솔직히,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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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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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윌슨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문화의 기원, 그리고 그 현상을, 다른 사회성 동물들의 행동과 그들의 사회구조와 비교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설명 기제---친족선택과 상호 이타주의, 자기 촉매화 모델, 이상 발달 등---를 도입하여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친족선택 이론은, 친척들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가까운 친척의 생존과 재생산 기회를 도모함으로써 유기체는 공유하는 유전자의 일부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가능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윌슨은 생물의 이타주의를 설명하는 방편으로 이를 채택하고 있다. 사실, 이타주의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는 것은 실제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윌슨도 이타주의가 자연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침팬지가 집단 사냥에서 얻든 먹이를 나누어 먹거나 어미 없는 새끼를 입양한다든지, 새가 자신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계음을 내는 경우, 벌의 독침 쏘기 등이 그 예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타주의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친족선택 개념인데, 혈연자를 돕는 행동을 야기하는 유전자는 선택 상 유리하며 개체군에 퍼질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기를 희생하여 혈육을 돕는 이타적 행동은 적어도 그것을 행하는 개체에게 손실을 주지만, 그 개체의 유전자에서 보면 득이 된다. 따라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살아남은 가까운 혈육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전파한다는 이기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개체들간의 이타주의는 상호 이타주의라는 기제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는 한 유기체의 행동이 미래에 보상받을 충분한 가능성이 있을 때, 생존의 관점에서 다른 유기체를 돕는다는 것이다. 윌슨은 사회성 곤충들의 이타적 행동이 친족선택을 우선하고 맹목적인데 비하여 인간의 이타주의는 궁극적으로 이기적인 목적적 이타주의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양가감정과 자기 기만, 죄의식으로 뒤범벅된 존재이지만 이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민족, 인종 간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만일 인간이 맹목적으로 이타적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되는 말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성향의 이상 발달 사례로는 전쟁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생물학적 성향이란 인간의 공격성이라는 유전적인 성향을 가리킨다. 우리는 사람들을 동료와 이방인으로 나누고 이방인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공격하는 행동은 타고난 것이다. 윌슨은 전쟁의 진화가 자가 촉매적 반응이었다고 말한다. 즉, 공격성은 군장 국가 및 국가의 성립하자 제도화했고 전쟁은 정책 수단으로 채택되기도 했으며, 전쟁을 가장 잘 수행한 사회 가장 성공한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보상의 결과, 인간의 공격성과 전쟁 행위는 계속 유지되고 발달되어 왔다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타주의나 공격성 등이 인간이나 동물계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모든 동물이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일 것이다. 생물의 행위는 내장된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회적 행동이나 문화의 진화란 그러한 유전자를 보존하고 증식시켜 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이에 따르면 생명의 주체는 유전자가 된다. 개체란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는 존재이지만 유전자는 영원히 살아남는다. 각 생물 종의 특성은 유전자가 보다 많은 복사체를 만들 수 있도록 했던 형질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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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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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 특히 사회적 행동과 문화에 대한 윌슨의 설명과 사회생물학적 대안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윌슨의 기본 가정은 모든 유기체의 행동은 그 진화 역사의 자연적인 결과라는 것, 즉 수백만 년에 걸친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 이루어진 상호작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행동 또한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 유전자의 지배를 받느냐이다. '어느 정도까지인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간과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회생물학에 대한 비판하는 이들은 흔히 그것이 인간 행위의 환경적, 문화적 영향을 무시한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윌슨은 인간의 행동 발달 통로가 하나의 유전자를 출발점으로 하여 죽 하나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들은 하나의 형질을 규정한다기 보다는 어떤 형질 배열을 발달시키는 능력을 규정하기 때문에 형질에 따라 환경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달라진다. 어떤 형질---예를 들어 PKU나 정신 분열증 등---을 예정해 놓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증세가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형질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며, 환경 또한 그 발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는 환경의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유전이 기본이 된다. 유전자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형질이 발현되기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는 복잡한 현상을 다루기에는 다소 단순한 비유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편의상 유전자와 행동 간의 관계를 '형질 발달은 경사지에서 공을 굴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떤 형질이냐에 따라 공이 굴러가는 지형은 천차만별이다. 외모 등과 같은 유전적으로 매우 속박된 형질들은 죽 뻗은 대로로 거침없이 나아가겠지만 행동 발달 지형은 훨씬 복잡하다. 물론 초기의 유전자가 지시하는 통로 쪽의 골이 더 깊이 패여 있으므로 보통은 그 쪽으로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압력이 작용한다면 공이 나아가는 방향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학습이나 문화도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그것들의 영향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들도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기에, '준비되어'있다. 윌슨은 인간의 사회적 진화가 문화적 진화와 생물학적 진화의 쌍궤도를 따라 나아간다고 말한다. 생물학적 진화는 그 속도가 보다 느리기 때문에 문화적 진화에 의해 추월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한계'가 있다는 것! 그 한계를 넘으면 생물학적 진화는 문화적 진화를 자신의 등뒤로 끌어당기기 시작할 것이다. 사실, 전 세계에 걸쳐 있는 매우 다채로워 보이는 문화 현상들도 '한계' 안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소수의 길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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