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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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덥지근한 날씨에 방안에 널어놓은 빨래들이 축 처져있다. 모기들마저도 무겁게 날다 내 매정한 손바닥에 부딪쳐 떨어진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앞이마가 유난히 무겁다. 삐질삐질 흐르는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에 온갖 먼지들이 달라붙기라도 한 것인 냥, 온 몸이 무겁다.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때는 이처럼 무거움, 나를 끌어내리는 무언가가 강렬할 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탈을 꿈꾸었다.

일상의 굴레를 벗고 날아오르는 꿈... 하지만 끈적끈적한 욕망의 몸을 가지고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회의 또한 만만치가 않다. 자유라는 것은 한계지어졌을 때만 의미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달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면 그림자가 너무 길다...' 사월 어느 날 밤에 수첩에다 적었던 글귀인데, <달과 6펜스>라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떠올랐다. 자다가 깨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서늘한 달빛을 온몸으로 맞을 때, 차고 기울어지기를 반복하는, 늘 죽어가고 그럼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달을 떠올릴 때, 그것은 신비한 여신이고 영원불멸한 꿈일 것이다. 그런 달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 가득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쭉 뻗은 길을 달리게 될 수도 있겠다. 그 때 짤랑거리는 금속성 소리가 주머니 속에서 적막한 공기 중으로 튀어나온다면? 그것이 몇 개의, 달과 같은 은백색의 둥근 동전들 때문이라면?

그리고 달을 향해 난 길에 멈춰 서서 등뒤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면? 그래도 이륙을 믿고 뛸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에 묶여있는 현실에서 잡을 수 있는 달이란 6펜스임을 인정할 것인가? 이처럼 <달과 6펜스>에서는 이상과 현실, 정신과 육체가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머셋 몸이 이 책 곳곳에서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하듯, 인간의 삶이란 미묘하고 모순된 것이다. 그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일상이란 무의미하고 뜨거운 정열과 모험이 있는 삶만이 가치있다고 말하려고 했을까?

오히려 일상 속에서, 무의미한 것을 의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삶에 이끌리지 말고 그것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 예술가의 삶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찰스 스트릭랜드가 예술가이고 천재이며 악마적인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는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40이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을 향해 나아갔던 그 모습에, 우리는 너무도 일찍 젊음과 꿈을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지금 이 상태로 머물도록 잡아끈다. 어떤 이는 스트릭랜드 부인처럼 물질에 대한 허영심이나 남들의 이목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짓도록 내버려둔다.

블랑슈 스트로브가 그랬듯이,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다. 물질에 대한 욕망,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 심지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몸과 마음은 끈적거리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러한 욕망들, 나를 구속하는 무거운 그림자에 분노한다. 스트릭랜드가 '안일한 행복'으로부터 뛰쳐나와 무한한 꿈으로 나아간 것처럼 나도 욕망을 벗어버리고 보다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 때도 많다. 하지만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살갗을 맞대고 사는 삶, 평범한 삶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세속에 대한 욕망과 이상에 대한 욕망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욕망이 갈등을 일으키고 서로 시소놀이를 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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