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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녹이 쓴 못 하나,
그 기능과 그 의미가 퇴색 되여 마치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로 보이는 그 순간 남들은 고철이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쓰레기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마치 신이 문은 닫아도 한쪽 창문은 열어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대공황의 숲에서 어떻게 살아 남아야 하는가? 고민하던 그 시절 우리들 에게도 아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삼촌들이 겪어야 했던 노동자들의 고뇌 속이 이 소설에서 잘 담겨 있다.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겪는 어부의 고뇌가 잘 녹여 들어 갔다면 이 녹슨 못 하나에 노동자의 삶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고철로 변한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 할까?
미래가 없는 사람은 역전의 빈민가라 불리는 노숙자들이다. 그들에게 꿈의 의미를 알까?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 ?
꼭 철강 노동자들만 겪는 시대의 아픔은 아닐 것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흔한 모습일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일하는 것이 싫고 짧은 시간에 힘들이지 않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강도가 되고 사기꾼이 된다. 더 나아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간과 이유 없는 살인이 자행된다.
시대가 인간의 지성을 따라가지 않고 혼자 너무 멀리 앞서서 가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정보의 바다 앞에서 자아를 상실해서 나타나는 이 사회의 또 다른 이데오르기인가?
삶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태초에 먹고 잠을 자는 것에 온 생각이 그 곳에 집중되었지만 지금의 우리들에겐 수 백배로 더 커지고 수많은 부류로 나뉘어 지는 이 사회에서 다양한 범죄는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작가는 하고 싶은 말과 느낌이 많은 것 같다. 한 장면 마다 그렇게 섬세한 글들은 마치 다른 사람에게 변명이라도 하듯이 왜 그토록 범죄자로 변해가는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이 떠날 수 밖에 없는지를 대변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그토록 정성을 들인 것이다.
고향은 버릴 수는 있지만 고향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진리 때문이다. 고향은 내 마음속 나침반의 시작이자 끝이다. 항상 그리워하는 마음의 저편에는 언제나 고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6명의 엉킨 실타래처럼 그 실을 끈기 있게 풀어서 다시 하나의 실타래로 내가 원하는 옷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 속 실타래의 엉킨 부분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이다.
못이 녹이 쓸었다고 못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버리면 쓰레기이지만 다른 고철과 함께 녹여서 새로운 금속으로 태어나는 잉태의 기쁨을 이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을 사실 2번 읽었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내 인생의 나침반이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가리키고 있는 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로 커 간다고 합니다.
특별한 시간을 만들기 보다는 매 시간을 책임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간다면 굳이 특별한 시간을 만들지 않아도 매 시간이 특별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요즘처럼 가정경제가 힘든 한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가 저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가지만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 삶 속에서도 언젠가 반드시 씨 없는 밭에서 곳이 꽃이 피기를 간절히 바람은 마음이 아닌 꽃밭을 일구고 언제든지 꽃이 필 수 있도록 자신과의 싸움에서 단 한번도 물러서질 않으며,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생자체를 아름답게 꽃 피우는 사람들로부터 올 한해 나도 더욱 더 열심히 삶을 살 수 있도록 희망을 얻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