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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 -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기억과 흔적을 찾아 일본을 걷다 19100829-19450815
이재갑 지음 / 책숲 / 2026년 8월
평점 :
#협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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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 가까워지면 아이들과 태극기를 달고 독립운동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평소에도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자주 접하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이런 일까지 있었다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을 만난다. 화면이나 책 몇백 쪽으로도 다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아 같은 시대를 다룬 소설이나 인문학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그때마다 서슬 퍼런 눈빛으로 글자를 따라갔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어떤 사회와 문화 속에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도 품었다.
그런 내 시선과 조금 달랐던 책이 이재갑의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였다. 나는 그동안 가해자의 잔혹함을 먼저 바라봤다면, 저자는 그곳에서 끝까지 살아남고 버텨낸 조선인들의 삶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분노만 따라가지 않게 됐다. 그곳에서 일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고, 이름을 지키며 하루를 견뎠던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됐다.
저자는 1996년부터 오랜 시간 일본 곳곳을 직접 찾아다녔다. 후쿠오카와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에 남아 있는 탄광과 군사시설, 묘지 등을 살피며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기도 했다. 사시사철 풍경이 달라지는 것처럼 같은 장소에서도 갈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는 저자의 기록은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읽는 듯했다. 한 번 묻어두었던 감정과 기억을 다시 꺼내 그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특히 후쿠오카 조세이 해저탄광 이야기가 쉽게 지나가지 않았다. 1942년 갱도에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183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었고, 그중 136명이 조선에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들의 유해가 바다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친 사람들을 생각하니, 숫자로 적힌 136이라는 숫자가 더 이상 숫자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도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을 것이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었을 것이다.
히로시마의 인골댐에서는 한동안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조선인을 구하려 했지만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시멘트를 부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한 사람의 목숨보다 공사가 중요했던 시대였다. 그 이야기를 읽고 나니 평범해 보이는 댐과 터널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사진 속 풍경만 보이던 곳에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모습까지 겹쳐 보였다.
오사카의 우토로 마을에서는 앞선 이야기와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힘겨운 생활과 차별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과 공동체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붙잡았던 것이 있었다. 그들의 삶을 읽으며 나 역시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책을 읽으면서 눈길이 자주 간 부분은 오랜 시간 현장을 찾아다닌 저자의 태도였다. 자료를 찾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장소에 가서 보고 듣고 기록했다. 같은 곳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한 번 보고 지나쳤다면 놓쳤을 이야기도 있었을 것 같았다. 사진가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결국 사라질 수 있는 것을 붙잡아 두는 일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키나와에서 저자가 자신의 가족과 연결되는 흔적을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나까지 숨을 고르게 됐다. 오랫동안 찾아다닌 역사의 한 조각이 어느 순간 자신의 집안 이야기와 맞닿은 것이다.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일이 저자의 가족 이야기로 이어지는 순간, 나도 책 속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들도 처음부터 ‘역사 속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였고, 친구였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무엇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번에는 연도나 사건보다 먼저 사람을 이야기해주고 싶어졌다. 누가 그곳에 있었고,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버텼는지를 아이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다. 아이들이 역사를 외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한 번쯤 상상해봤으면 한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를 읽고 나니 광복절에 태극기를 다는 일이 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하루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생각하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역사 공부는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은 뒤에는 사진 속 장소들이 자꾸 떠올랐다. 지금은 풀이 자라고 사람들이 오가는 그곳에 한때 누군가의 두려움과 기다림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역사 현장을 찾아가 보고 싶다.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실제 공간에서 마주한다면 아이들도 역사를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나 역시 그날에는 오늘보다 더 천천히 그곳을 바라보고 싶다.
>> 이 서평은 책숲(@acorn_forest_book)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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