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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된 책들 - 장석주의 책읽기 1, 반양장본
장석주 지음 / 바움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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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식 속에서 책(冊)과 벗(朋)은 비슷한 모양이다. 나는 술보다는 친구들이 좋고 친구들보다는 책을 더 좋아한다.(물론 책보다는 애인이 좋다.) 별 고민 없이 지원서 취미란에 '서점유랑'이라고 적는다. 어릴 적에도 부모님께 혼나면 심난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집에서부터 종로의 서점까지 작은 발로 걷곤했다. 어지간한 분은 걷는 동안 풀렸다. 그리고 나를 맞이한 것은 신세계였다.(백화점말고...) 어딜 가나 지갑에 돈은 없어도, 책가방에 책을 한 권씩은 꼭 가지고 다닌다.(물론 나만 그러겠는가.)

'장석주'란 이름을 알게 해준 이 책은 한 권으로 일흔일곱 권의 책을 맛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밥값을 한다. 이 책에 소개된 구절들은 바로 써도 괜찮을 만큼 신선하고 생명력있다. 이 책에 오른 목록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것도 있고, 낯선 것들도 있다. 물론 일흔일곱 책이 일관된 형식이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책을 읽고 난 저자의 의견과 다른 책을 읽고 난 후의 의견이 상충하는 경우도 있다. 혼란스럽기보다, 마치 배고픈 사람이 좋은 음식점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며 느끼는 흥분감이 느껴진다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책읽기의 기술'을 전수받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저자는 다른 책벌레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책벌레들의 비기를 전수해준다. 우선 무작정 책을 읽기보다는 자신의 지식세계를 계통화하여 책을 읽는다. 예를 들어 이 책은 '안/바깥/너머/깊이'라는 분류로 구성돼있다. 그리고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하부주제들이 가득 차 있다. 물론 저자는 일부러 구분한 것은 아니라했지만, 편식은 음식이나 독서에나 좋지 않다.

다음으로 목차와 머리말부터 읽는다. 책장을 펼치고 이 책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초행길에 지도를 들고 가듯. 각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내 경우 때론 각주에 빠져, 책읽기의 흐름을 방해받기도 한다. 허나, 각주를 간과하면 길을 외롭게 홀로 가는 것과 같다. 덧붙여 전체흐름이 파악됐다면, 주요 키워드를 통해 책의 내용을 빠르게 짚고 가는 것에도 익숙해져야한다.

이렇게 책읽기에 관한 책은 김 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다츠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이후 세 번째다. 책벌레들에게는 묘한 페르몬향 느껴진다.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를 쓴 이권우는 '책읽기에 관한 즐거움을 설명하는 데 '에로틱한 수사학'이 동원된다면... 책벌레다.'라고 감별한다. 이 책에서 인용된 <책벌레>의 클라스 후이징은 애인과의 정사와 책읽기를 은유로 엮었다. 처음 책을 들고 하얀 속살을 펼쳐 보람줄도 배를 가를 때면 나 역시도 묘한 쾌감을 느낀다. 허나 아직까지 책벌레라기보다 변태기질에 더 가까운 듯하다.

높게 쌓인 장서들은 최고급 와인을 숙성시키는 질 좋은 오크통과도 같다. 책벌레들에게 멋진 날개짓을 선물해줄 고치다. 그런 꿈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 한 해에 책값으로만 500만원 이상을 지불하고, 책의 무게로 인해 아파트 바닥이 주저앉았다는 등의 사치 아닌 사치는 마냥 부럽기만 하다. 허나, 전문가의 책읽기에 주눅이 들어 정작 책을 집어들지 못하거나, 요약과 설명만으로 만족해버려서는 안되겠다.

술 마시고 괜한 택시만 안 탔어도, 책 몇 권은 더 샀을 터인데... 물론 그 추억에는 책에서 읽을 수 없는 감동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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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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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월의 풍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고전이란 것들이 있다. 험한 바다에서 오히려 등대가 빛나듯, 이런 고전들은 세상이 험난할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사회과학에서도 이런 고전을 찾을 수 있을까. 아마 찾을 수 있다면, 심오한 분석과 통찰을 바탕으로 그 설명력과 예언력이 세대를 거쳐도 전혀 퇴색됨이 없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더불어 언제 읽어도 힘이 불끈 솟는 비아그라같은 것이라면 두 말해 무엇하랴.

나는 사회과학의 고전 반열에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이후 '선언')>을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몰락한 마당에, 한참 개혁신당 논의가 나오고, 지역주의가 문제시되는 마당에, 왠 '공산당선언'이냐고? 분명 선언이후 150여 년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 자본주의의 가시적 승리는 인류를 역사의 종착역에 다다르게 하여, 내릴 때 놓고 내린 것이 없는지, 내려서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고민하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본주의는 불안하며, 그 '불안'을 150여 년 전에 예견했던 것이 마르크스였고 '선언'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모든 진보이론은 마르크스의 자손들이다.

대학에 갓 들어가서 모든 것이 낯설었을 때 우연히 과실에서 문고판 '선언'을 보았다. 책을 집에 가져가지 마란 선배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그때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시작하여 그 날 끝까지 훑고 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많이 깨달았냐고? 천만에. 나는 그저 내가 읽은 목록에 '선언'이 있으면 폼이 날 것 같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읽은 것이었다.

저자가 비판한 우리의 진보영역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선언은 또 하나의 '정감록'처럼 주문(呪文)에 불과했다고 비판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 비판과 저항을 위해 들여온 외래문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한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성장한 이때 '선언'을 다시 읽어야 하지 않는가 묻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첫 부분은 저자가 실제 노동운동을 하면서 느낀 현실과 선언의 예언이 얼마나 맞았는가를 간단하게 풀어주고 있다. '몸으로 읽은 '선언''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무척 강하다. 읽다보면 양심에 비수를 꽂는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다. 두 번째는 스스로 번역한 '선언'전문이다. 오래 전 읽었던 그 명구들을 다시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언'이후 미제로 남거나 진행중인 몇 가지 논쟁점들에 대한 정리다.

이 책은 쉽다. 집중한다면 하루도 못가 다 읽을 수 있다. 저자의 (무척 특수한) 개인적 경험과 버무린 선언의 해석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보는 덤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사실의 풍요 속에 철학의 빈곤'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겨자만큼 강하다. '...어떻게 평등한 세상으로 일구어나갈 것인지 고민하자고 당부 드린다.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고민하자.'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단 10분 미래와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데 이젠 10분도 내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탄식인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마르크스의 이 말은 영화 '식스센스'에서 오스몬드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브루스윌리스에게 했던 '죽은 사람이 보인다.'라는 말처럼 여전히 충격적이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이 정의는 어금니처럼 굳건하다.

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선언'을 고전에 반열에 올린단 말인가. 오늘날 고전이라 함은 고루한 학자들이나 교수들이나 읽는 게 아닌가. 아니면 책장에 장식용으로 조용히 꽂혀있는 물건에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러나 '선언'을 안 읽어보고도 마르크스주의자라 어깨를 펴는 '좌파 유아'들과, '선언'을 읽지 않고도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는 '우파 애늙은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지 않은가. 선언을 책장 속에 진열해놓을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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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의 사색 - 재독 철학자 송두율의 분단시대 세상읽기
송두율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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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송두율 교수를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막 입학한 때였다. 그의 저서 <역사는 끝났는가.>는 한 번쯤 통독해 볼만한 책이었다. 그 후 몇 년동안 후배들에게 권해주기도 했다. 그가 던진 화두가 무척 신선하고 내게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시끄럽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란은 건강함의 증거라 생각한다. 거물 간첩으로 몰락한 그의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죄와 학문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지...

송두율 교수의 입국이 계속 무산되면서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신간으로 애면글면 위안을 삼았다. 기다린 만큼 필요한 때 그의 글을 접했으면서도 역시 글과 책으로써는 한계가 있어 아쉬웠다. 그 아쉬움은 독자의 미흡한 독해능력 탓도 있겠지만, 송두율의 글쓰기를 제한하는 경계인의 현실이리라.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낸 <경계인의 사색>은 그의 민족애와 철학의 깊이가 느껴지는 책이다. 비단 남·북 간의 통일문제 뿐 아니라, 디지털시대의 미학과 종교 동양사상 등 그의 폭넓은 지적탐험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가 '독자의 직관적 이해를 도우려'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정하듯 '압축적이고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시 경계인으로서 불립문자의 마음을 전하기란 어려운가보다.

다양한 글들 중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내재적 방법'에 의해 북한의 '개건(改建)'을 평가하는 부분이다.(3부 또 다시 '내재적'으로 본 북한.) 이 부분에서 '엄격한 자기 비판'을 전제로 할 때만 진정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그가 주장했던 내재적 방법에 근거해 북한의 개건을 바라보고 있다.

송두율은 북한이 '평균주의에 따른, 낮은 수준의 국가에 의한 분배보다는 일정 정도 차등화를 유도하는 물질적 자극'을 선택했다고 인정하며,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제 운영의 개선책보다는 '인민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동고동락한다는 일체감'이라고 주장한다.

덧붙여 북한 스스로가 사회주의적 소유형식을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점을 들어 중국의 '개혁'과 북한의 개건은 다른 것이라 전제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북한의 개건수준이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로 '천안문사태' 등 중국의 개혁과정에서 드러난 부작용들을 제시함으로써 중국과 북한의 연관성에 대해서 완전한 부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북한 개건 성공의 관건은 '제국주의 련합세력의 포위'라는 '힘든 조건'을 헤쳐나가는 데 있으며 이것이 중국의 사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북한의 현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개건 성공의 또 하나의 중요한 관건은 남한이며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통일의 물질적 기반을 닦는' 과제임을 각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한발 앞선 것은 그러한 지원이전에 북한이 '어떠한 사회를 꾸리려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앞서 언급했듯이, 글이 갖고 있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다. 6·15공동선언에서 나타난 '자주'에 대한 논의, 남북 통일방안의 공통성에 대한 그의 내재적 방법이 객관성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검토하였으나, 명확히 결론까지 도달하지 않는 것은 경계인으로서 현실이 제한한 탓이 크다. 그에게 '오컴의 면도날'은 애초에 그 스스로 거부했거나, 아직까지는 부담스러운 도구라 생각된다.

내면의 외침과 외부의 메아리가 다를 때 육신은 그 경계에 서게 된다. 그곳은 서로 다른 주파수의 음파들이 어지럽게 충돌하는 혼란과 부담의 공간이다. 그는 글쓰기와 몸을 지치게 했던 그 경계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만하면 이제 내면의 외침과 외부의 메아리가 공명하는 것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지성계는 '송두율'이라는 공명장치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으로 인해 혜택을 볼 것이다.

송두율 교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는 곳은 경계의 날 위다. 실존의 한계상황이다. 물론 누군가는 무당의 '작두타기'처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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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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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하면 겁도 없다. 아는 것이 없으나, 한글을 깨쳤다는 것 하나만을 무기로 이리 무턱대고 덤비니 문제다. --; 결론부터 말하자. 매트릭스로 철학을 접하는 것은 쉬울 지 모르겠다. 그러나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이런 의미를 표면에 드러냈다면 분명 흥행에 실패했을 것이다. 이 책은 지젝의 유명세를 등에 업으려는 의도가 유쾌하지않다. 단지 제일 많은 분량의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 지젝은 이 책을 기획하고 윌리엄 어원이라는 엮은이보다 더 강조되어 이름이 올라있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 역시 지젝의 대단한 기획의 일환이라 여기며 이 책을 손에 잡았을 것이다.

이 책은 15명의 학자들이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흄, 라캉, 마르크스 등 철학적으로, 때로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 등 종교적으로,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사르트르 등을 통한 문학적 방법으로 매트릭스에 접속을 시도한다. 이들이 내게 내민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번갈아 먹으면서, 내가 이 책을 통해 접한 인간문제에 대한 매트릭스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네오는 누구인가. 둘째, 네오와 사이퍼의 선택 중 옳은 것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진실은 존재하는가.

플라톤의 동굴비유가 생각나는가. 동굴 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체라 믿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동굴 밖으로 기어 나와 밝은 세상을 보고,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이 책에서 네오는 어두운 동굴에서 탈출하여 진실을 보고 다시 동굴로 되돌아가는 선지자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문제는 동굴 밖으로 어렵게 나와 '그'가 본 것이 황량한 '진실의 사막'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인정할 수 없이 괴로운 현실대신 '진실하면서 동시에 가치있는 지각경험'으로 '쾌락'을 선택한 사이퍼의 결정은 정당하지 못한 것인가? 우리는 고민하는 사이퍼 앞에서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조언하는 것이 옳은가? 매트릭스를 부정하는 것이 절대선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지젝은 매트릭스가 현실을 왜곡함과 동시에 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그리고 매트릭스의 논리구조가 갖고 있는 버그들을 지적한다. 그래서 지젝은 매트릭스 속편이 진행될수록 ''진실의 사막' 역시 매트릭스가 만들어 낸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런데 정작 영화는 그런 결말은 아닌가보다.)

지젝이 던진 물음 중에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소개해본다. 매트릭스에게 인간이 단순한 건전지에 불과하다면, '왜 매트릭스는 각 개인을 그 자신의 유아론적 인공의 세계에 몰입시키지않는가? 어째서 모든 인간이 하나의 똑같은 가상 세계에 살도록 프로그램을 조정함으로써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가?' 지젝은 그 대답으로 '주이상스'(Jouissnace:고통과 쾌락의 변증법적 관계-내맘대로)를 든다. 음... 스미스가 모피어스를 잡아 심문할 때를 기억나는지. 아무도 고통받지 않고 모두가 행복한 세계로 설계했던 매트릭스가 실패했다는. 그러면서 인류는 고통을 통해 현실을 인식한다는.

영화에서 네오는, 엘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인도되듯, 하얀 토끼를 따라 진실로 인도된다. 나도 '그'처럼 '토끼를 따라'가봤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리였는지 모르겠으나, 두 마리 토끼 중 한 마리를 포기해야했다. 영화? 아니면 철학. 나름대로 진실을 알기위해 약을 삼켰으나, 여전히 헤매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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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이론과 쟁점 현대의 지성 117
고부응 외 11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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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여러 명인 책의 장점은 비빔밥을 먹는 것과 같다. 한 권으로 대략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큰 장점이다. 반면 하나하나 자세한 논의를 진행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특히 처음 만나는 용어들과 개념들을 접하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낯설게 뱉어내는 용어나 인물들 중에서 아는 이름이라도 하나 만나는 것은 색다른 기쁨이다.

탈식민주의(post colonialism)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논의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부정적인 근대성을 극복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극복대상인 근대성은 전지구적으로 동일한가? 여기에서 지역과 역사적 조건에 따라 근대성이 형성되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더군다나, 제3세계의 근대성이란 대부분 자생적이라기보다 그 출생시기가 식민시대와 궤를 함께 하지않는가.

탈식민주의는 그러한 근대성이 식민시대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과 달리, 탈식민주의이라는 말이 인기리에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탈식민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류정도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탈식민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서구의 이론으로 탈식민주의를 해석한 바바, 스피박과 같은 학자들을 주류로 파악하는 것도 그렇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해석은 탈식민주의에게 다시 '유럽행 우표'를 붙이는 것과 다름없다. 극복대상인 근대성을 전지구적으로 동일시하는 것도 또 다른 유럽중심주의다. 오리엔탈리즘으로 정리되기 이전에도 제3세계의 투쟁의 역사는 존재했다. 사이드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유럽중심의 역사의식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뜻에서 탈식민주의학자인 아마드(Ahmad)는 사이드를 '문화적 양서류'라 비판한다. 그들에게 탈식민주의의 뿌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이들에게는 사이드보다 <검은 피부, 흰 가면> 파농(Fanon)의 발자취가 더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는 불안하게 동거하고 있다. 동거를 찬성하는 쪽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가 갖고있는 매력에 이끌리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중심적인 거대담론을 해체하여 주변화되었던 제3세계 '타자'들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동거를 반대하는 입장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메스에는 눈이 없다. 들이대야할 환부와 다른 부위를 구분하지 못한다. 서구중심의 거대담론뿐 아니라, (어쩌면 다른 의도에 의해) 그나마 제3세계가 갖고있던 보호기제까지 해체하려든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장에 무방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 책은 탈식민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문들을 모여있어 효율적인 효과는 있는 듯하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분량의 글들이긴 하지만, 그 논의의 깊이가 깊어서 완전한 이해는 요원한 듯싶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내 무식함이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저자들이 모두 영문학자라는 것이다. '영어'라는 제1세계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도 한국인이라는 제3세계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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