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와 역사의 종말
스튜어트 심. 조현진 역
이제이북스. 2002.

데리다의 입장에서 철학적, 과학적 종말론을 배격하는 책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프랜시스 후쿠야마, 장 보드리야르, 폴 데이비스. 비판 대상의 이론은 익숙하지만 데리다의 이론이 낯설어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다. 전에 철학사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 데리다를 회피한 대가다.

다만 데리다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지 단초를 잡은 것 같다. 그의 해체는 책에 숨어 있는 내용에 신선한 빛을 비추어 준다.

스튜어트 심 교수는 데리다의 해체를 이용하여 정치적 독해를 시도한다. 기존의 입장을 해체하여 적극적인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무엇이 아니다라는 논증을 이용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리가 흥미롭다.

다만 그 논증이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이사야 28:10)` 것에 귀착하는 것 같아 아쉽다. 이는 해체의 한계라기보다는 절제의 지혜로 보인다. 해체의 논리가 종말을 선언하고 미래를 닫는 포스트모던을 논박하고 희미하나마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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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희생양 - 르네 지라르와 불교문화의 기원
정일권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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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희생양
정일권
SFC출판부, 2013.

20세기 들어 서구에서 불교의 기세가 맹렬했다. 양자역학을 이미 불교에서 발견했다는 등의 과격한 찬양 일색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불교에 대한 사랑이 주춤하는 편이다. 정일권 교수의 책은 그러한 경향을 잘 대변해준다. 그는 르네 지라르에 기반한 사회인류학을 바탕으로 불교를 해체하는데, 이는 사회인류학적으로 불교를 조망한 시도를 통해 불교 이해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 이제 불교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이 책을 경유해야 할 것이다.

정일권 교수는 국내엔 몇 없는 지라르 전문가이다. 르네 지라르의 철학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다. 20세기 후반에 `거울 뉴런`의 발견으로 그의 위상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 책은 지라르의 이론의 기초적인 부분을 소개하지 않으므로 최대한 간략히 언급하겠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을 `모방자`로 이해한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을 모방한다. 모방의 깊이는 매우 깊어서 심원한 욕망까지 모방자를 통해야만 한다. 예컨대 동생은 형이 가진 것을 갈망하고, 여자는 연예인의 패션과 얼굴을 모방한다. 모방의 열망은 모방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치열해져 모방자는 폭력마저 불사하게 된다. 모방자와 모방 대상과의 거리가 극도로 가까워지는 현상이 사회 전체를 지배할 때 그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는데, 이를 `무차별화`라고 부른다. 무차별화는 역병처럼 전이되며, 사회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온다.

이 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찾은 해결책은 희생양을 만들어서 폭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희생양은 사회의 폭력을 담당할 정도로 사회에 속해 있어야 하지만 그 폭력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을 정도로 독특해야 한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장애인과 고아, 거지는 희생양의 주요 후보가 되어왔다. 희생양은 폭력을 전담해야 하므로 그럴만한 죄를 지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는 희생양으로 하여금 온갖 금기와 죄를 짓도록 강요한다. 이렇게 하여 `무고한` 희생양은 까닭 없이 미움을 당하게 된다.

희생양에게 집단적인 린치를 가함으로써 사회의 누적된 증오가 해소된다. 폭력에 참여한 사람은 이러한 `기적`에 놀라 이를 신의 개입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무고한 희생양을 제물로 삼아 신의 존재와 행적이 입증되고 종교가 시작된다. 따라서 지라르는 신의 이면엔 희생양이 있고, 바로 그 희생양이 신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시간이 지나 원초적인 폭력의 효과가 떨어졌을 때 (실은, 다시 무차별화가 사회를 장악하기 시작할 때) 사회는 과거의 폭력을 되풀이한다. 단, 이제는 이러한 폭력이 사회를 뒤흔들지 못 하도록 상당히 열화하여 모방한다. 위기와 폭력을 모방하는 기간에는 사회의 금기가 해방된다. 상당수의 금기(~을 하지 마라)가 무차별화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음식에 대한 금기, 복장에 대한 금기, 행동에 대한 금기가 허용되고, 오히려 권장된다. 모방은 사회 내의 비정상자를 제의화된 폭력의 제물로 삼고 그것의 영험한 효능을 느낌으로써 끝난다. 사회는 이러한 모방과정을 신의 이름 아래서 진행한다. 이것이 지라르가 말하는 축제의 기원이며 역사적인 역할이다. 그는 최초의 폭력을 문화의 기원이라고 여긴다. 인간이 아닌 동물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가축을 치기 시작하고, 금기에서 윤리와 제도가 나왔으며, 제의적 축제가 사회를 응집시키고 문화를 배양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폭력을 발견하지 못한 부족들은 위기를 못이기고 사라진다. `자연선택`을 받지 못한 것이다.

정일권 교수는 이러한 지라르의 이론을 불교에 적용한다. 그는 불교를 사회인류학적으로도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했을 때 불교의 알려지지 않은 면이 드러난다. 이 책에 따르면 붓다가 사실은 희생양이었고, 승려들은 규격화된 희생양이었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엄격히 나눠지며, 출가자가 희생양의 계율을 지키는 데 반해 재가자들은 온갖 욕망의 추구가 허용된다. 입적한 고승의 등신불은 복을 부르는 부적이고, 승려는 걸어다니는 사회적 시체이자 죄악의 정화소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승려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사회의 계층질서를 전적으로 긍정한다. 승이 사회적 시체라는 점이 중요한데, 공 사상과 불가의 수행이 여기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여기에 양자역학이나 데리다의 해체 사상과 연결될 여지는 없다. 오히려 희생제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가를 읽어낼 수 있다. 저자는 불교에 깃든 희생제의를 노골적으로 파헤친다.

정일권 교수는 사람들이 말하는 불교가 동양의 불교인지 서구의 낭만화된 불교인지 묻는다. 서양의 불교는 서양이 자신의 문화를 투영해서 오독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교토학파의 선불교는 서양을 모방하려는 질투의 발로이다. 숭고한 윤리를 자랑하는 평화의 종교로서의 불교는 최근에 고안된 작품이다. 사회질서에 비판적이고 소외된 자를 신원하는 윤리적 전통은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의 예언자들에 닿아 있다. 아쉽게도 서양을 따라잡으려는 교토학파 선불교의 시도는 일제의 전제주의를 사상적으로 정당화하면서 파국을 맞는다. 불교 근대화의 바통을 프로테스탄트 불교가 건네받지만 아직은 서구 문명의 근대성을 따라잡기 요원하다. 여기에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불교를 수용하는 사상가들이 반민주주의적이고 비윤리적인 희생제의를 정당화하지는 않는가 캐묻는다.

˝붓다와 희생양˝을 읽기 위해서는 제반 지식이 필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저자가 상당히 불친절하다. 동서양의 불교뿐 아니라 불교를 수용한 사상가들의 이론까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불교를 그것의 기원에서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싯다르타 시대의 인도에 대한 거친 스케치조차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책을 원숙하게 비평해낼 수 있는 독자가 우리나라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비록 방대한 양의 참고문헌이 신뢰성을 보장해주지만 저자가 대결상대를 좀 더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

정일권 교수가 이 책의 내용에 기독교를 포함하면서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서술하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지라르의 관점은 서구 문명과 기독교 전통의 우월성을 주장하는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이는 단순한 기독교 변증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문제를 공개하고 해결의 단초를 지라르의 입장에서 간략히 설명했으면 좀 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지라르에 대한 비판을 암시적으로 남겨놓은 점도 아쉽다. 지라르의 이론은 저자가 표현한 대로 사실을 `거칠게` 다룬다. 이 때문에 심리적인 거리감이 들기 쉽다. 예컨대 나는 아직 지라르가 왜 사회인류학적인 이론인지 궁금하다. 사회인류학적 이론의 평가 기준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아봐야 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불편함이 있다. 지라르의 이론이 왜 과학적인지(반증가능성의 기준에 따라 어떻게 반증이 가능할지), 그리고 지라르의 이론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명시해준다면 지라르의 관점을 기반으로 한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저자가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불교에 적용한 것처럼 지라르의 관점은 활용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어로 출판된 책을 소개하자면 경제학에 적용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한 책으로는 김진식 교수의 ˝르네 지라르에 의지한 경제논리 비판˝이 있다. 김진식 교수의 문제의식을 공감하지만 자본주의를 긍정하며 경영과 창업에 대해 적용한 책은 피터 틸의 ˝제로 투 원˝이 있다. 사람들은 이 책이 독점을 옹호한다고 비판하지만 피터 틸의 문제의식은 `경쟁을 일반화한 현대의 무차별화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피터 틸이 제시한 대답은 경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기업은 독점기업이 되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의 비관적인 인간이해로 볼 때 피터 틸이 독점기업의 폐해를 정당화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르네 지라르는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지만 세계적인 이론가이다. 르네 지라르의 입장에서 포스트모던주의의 사조를 평가한 책은 정일권교수의 ˝우상의 황혼과 그리스도 (르네 지라르와 현대 사상)˝이 있다. 이 책도 대결상대의 사상에 대해 소개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그러한 소개가 포함되었다면 책의 분량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을 것이다. 책에 담긴 내용의 밀도가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정일권 교수가 쓴 책들을 살펴봤을 때, 그의 의도는 논증과 증명보다는 르네 지라르의 관점을 바탕으로 한 학술적 성과들을 소개하는 것에 가깝다. 르네 지라르의 학술적 결론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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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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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행복의 기원
서은국 지음
21세기 북스. 2014.

이 책은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행복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 저자는 행복에 대한 기존의 조언들이 가진 편견을 밝히고, 최근까지 밝혀진 행복에 대한 과학적 이론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식의 실제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설명들이 저자에 의해 파헤쳐진다. 그러면서도 책의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인데 바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나머지 것들은 주석일 뿐이다(p. 192)”

서은국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행복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그는 최근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진화 심리학의 관점으로 인간과 행복을 바라본다. 책에 의하면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추구한 진화의 결과물인 뇌에 큰 영향을 받으며, 행복은 뇌에서 경험하는 쾌락이다. 저자는 이런 진화심리학의 토대 위에서 책을 서술해 나간다. 책을 읽고 나면 생존에 필요했던 음식과, 생존을 도와주었던 사회성이 현재의 행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기존에 출판된 진화 심리학에 바탕을 둔 교양서는 공격적인 무신론과 성적 가십에 치중한 내용이라는 한계를 보였다. 지나치게 기독교 진영을 신경 쓰는 듯한 모습은 오히려 유사 과학인 창조론에 대한 관심을 이끌었다. 또한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진화 심리학이 성에 대한 파문에만 유용하게 인용되는 모습은 너무 가볍게만 보였다. 서은국 교수는 이러한 기조를 비틀어 행복이라는 중후한 주제를 다루는 데 성공했다. 이는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인문학만의 주제라고 여겨졌던 행복이 이제는 과학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최근 논의되는 ‘통섭’은 과학이 인문학을 정복하는 것으로 끝날까?

저자는 행복에 대한 설명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한 이론과 다윈으로부터 유래한 이론으로 나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만물에 목적이 있다고 보기에 관찰자의 주관과 시대의 편견이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진화론에 기반한 설명이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행복을 설명할 수 있다. 실험에 의한 통계가 주관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설계된 실험들이 기존의 상식을 무너뜨린다. 저자는 이러한 실험들의 의미를 자연스러운 비유로 그 의미를 풀어낸다. 행복은 ‘동전탐지기’이며 ‘아이스크림’과 같고, 인간은 ‘사람쟁이’이다.

이 책은 상당히 건질 내용이 많다. 저자가 공격하는 편견은 실제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활 속의 사소한 즐거움이 행복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거짓이다. 오히려 그런 소소한 즐거움을 최대한 많이 경험해야 한다. 또한 돈이나 외모, 건강 같은 객관적인 조건은 행복에 영향을 미치지 않다. 오히려 그런 조건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이 개인의 행복을 좌우한다.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소가 유전자라는 점은 알고 있는가? 얼핏 보면 유전자 결정론으로 보이지만 저자는 이 함정마저 비켜나가며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 지는지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왜 한국인이 그 높은 경제수준을 가지고도 불행에 빠져있는지를 분석한다. 책의 전반부가 인간은 왜 행복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설명이라면, 후반부는 그 설명을 현재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 요약하자면, 행복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인 사람과의 관계가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비록 한국의 문화에 대한 처방까지 제시하지는 않는다만(이는 책이 다루고자 한 범주를 벗어난다), 불행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진단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시각을 보여준다. 전반부의 결론이 행복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이고 건전한 설명이므로 진화심리학을 꺼리는 이도 수긍할 만 하다

진화심리학은 이제 기존의 심리학이 다루고 있던 주제에 대해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다. 인문학은 행복이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진화심리학을 비롯한 과학에 치이고 있다. 앞으로 과학은 더욱 더 대담한 주장을 펼쳐 나갈 것이다. 지금은 과학이 신과 도덕을 재구성하고, 행복을 설명해 내는 시대이다. 과연 인문학과 같은 분과학문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과학의 야망에 아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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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분 머리가 좋아지는 눈 건강법
나카가와 가즈히로 지음, 이근아 옮김 / 이아소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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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머리가 좋아지는 눈 건강법
나카가와 가즈히로 지음, 이근아 옮김
이아소
 
미국 의학박사이자 일본의 비전 피트니스센터 소장인 나카가와 가즈히로의 책이다. 그는 미국 내 스포츠 업계 등지에서 채택한 시력 교정법을 일본에 도입한 사람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시력은 안구 자체의 성능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력은 뇌의 정보처리가 더욱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시력에 대한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 시력은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뇌가 판단, 해석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토털 프로세스이다.˝(p. 35) 
 
저자의 주력 분야에 맞게 책에는 근시, 난시, 원시, 약시 등에 맞는 시력 향상 프로그램이 실려 있다. 각 프로그램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을 진단하고 뇌를 훈련한다. 그에 따라 훈련 내용은 몸을 움직이거나 뇌를 자극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시력 향상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소와는 많이 다르다. 라식이나 라섹 등과 같은 거창한 수술과는 달리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가치가 돋보인다. 
 
그 뒤로 나오는 눈을 망치는 습관 교정 또한 흥미롭기는 매한가지이다. 근시에 많은 습관, 난시에 많은 습관 등 저자가 시력 교정 센터에서 많이 지켜보았던 악습관들을 분류하고 처방한다. 이번에도 저자의 처방은 간단하며, 돈도 들지 않는다. 말 그대로 습관의 변화일 뿐이다. 여기서 독자의 노력이 중요한데, 습관은 고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의 깊은 독자는 나카가와 가즈히로 박사의 기본 논리를 눈치챌 수 있다. 뇌(정신)가 시력(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시력 또한 뇌의 정보처리에 영향을 미친다. 책의 후반부와 맺는 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논지는 다음과 같이 발전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지만 몸과 마음은 떨어져 있지 않다.` 다소 주술처럼 보이지만 이는 뇌 결정론에 반대하여 세계적인 뇌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창발성 이론과 함께 내세우는 주장이다.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IT 기술 발전으로 인해 수혜를 받는 현재 세대는 시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으리라 예상한다. 사회마다 특정한 질병이 있다면 현대사회의 질병은 시력의 저하를 꼽을 수 있다. 이는 곧 근시안적 시야로 이어지고 정보화 사회 고유의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정신과 육체가 칼같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를 의식하고 있음을 맺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시대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정보화 사회에 의한 뇌의 피로를 화두로 삼아 `정보 스트레스`에 대한 해결책을 소개했다.˝(p. 215)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는 둘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 300년 가량 인문계와 과학계에 영향력을 끼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 대한 분투를 이 책에서 희미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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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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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씨름하다
토마스 G. 롱, 장혜영 역
새물결플러스

기독교 설교학자 토마스 G. 롱의 책, ˝고통과 씨름하다˝는 세속화된 시대가 마주하는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자연현상의 인과현상이 낱낱히 밝혀진 현대에도 굳건히 자리잡은 신앙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이 몇 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언제나 무고한 고통과 얽혀 있다.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신은 선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전능하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세상에는 이토록 악이 만연한가?` 고통에 대한 문제는 신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설교자들(질문에 대답해야 할 신자들)을 예상 독자로 설정하여 이러한 문제의 묶음에 대한 답을 풀어준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과학이 신의 이름으로 설명되던 것들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렸다. 하늘에서 치는 번개와 몰아치는 폭풍우는 수학의 원리와 과학의 법칙들로 설명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악이 신의 징벌 혹은 연단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이제는 심리학적으로, 신경과학적으로 풀어헤쳐진다. 
 
여전히 신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쓰나미가 몰려오고 허리케인이 도시를 집어삼킨다. 온갖 생명이 그 앞에서 사라진다. 구원의 노래와 기도를 신께 올리는 사람 역시 피해가지 못한다. 연약한 어린 목숨도 견뎌내지 못한다. 이제 신은 세상의 고통을 해명해야 한다. 악에 대해서, 그리고 무죄한 피해자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신이 해명할 의무는 없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신자들에게 속해 있다. 다시 말해 신의 이름 아래에서 자라난 문명은 과학과 무고한 고통과 마주하며 세계관의 위기를 느낀다. 그리고 이 위기를 해소해야 할 의무는 신자들에게 있다. 이는 신자들에게 이중의 고통이 된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문제를 어떻게 웅변할 것인가? 
 
고통의 문제를 일컬어 신정론이라 하는데 이것은 비교적 최근인 200~300년 전에 서구 문명에서 제기되었다. 신정론의 구성을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이 존재한다.
2.    신은 전능하다.
3.    신은 사랑이 많고 선(善)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이 피할 수 없는 모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 고통이 실은 무고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의 반론을 피할 수 없다.
 
“아하,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무고한 고통이란 없다고? 그렇다면 부모에게 살해당한 아기들은 자기 죄값을 받은 것인가?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저 어린이들 역시 무언가 죄를 저질른 게 틀림없군? 얌전히 횡단보도를 건너다 뺑소니 때문에 비명도 못 지르고 죽은 임산부는? 뱃속의 태아는? 그들은 무고한 고통을 당한 게 아니군?”

저자에 의하면, 신정론은 단순히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위기라는 데 의미가 있다. 기독교의 토양에서 자라난 현대인들은 반드시 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 위기는 수많은 질문을 낳는다. 
 
`악은 어디서 왔는가? 신이 만들었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신은 선한가?`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른다.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토록 악을 방치하는 신을 예배할 수 있는가?’  
 
저명한 기독교 설교학자 토마스 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매를 걷고 일어선다.

책은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다.
1장은 시대적 배경을 설정한다. 예배를 드리는 와중에 재앙을 맞은 리스본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현대인은 모두 리스본의 후인이라 보면 된다. 세속화와 과학으로 인해 우상이 사라지는 현상을 다룬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가 제기된다. 고통의 문제는 기존의 세계관을 깨드린다. 
 
2장은 위의 논리적 대립 구도가 설정된다. `사랑이 많은 전능자가 있는데 왜 무고한 고통이 있는가?` 이에 대응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워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을 희생하고 영지주의로 빠져든다.
저자는 슬며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밝히는데, 그에 의하면 이러한 논리적 대립 구도는 불공평하다. 저 명제 안의 신은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은 최종적인 원인에 불과하다. 그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다. 
 
3장은 신정론을 목회적으로 다룰 때의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설명한다. 예컨대 고통은 돌봄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지적 깨달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4장은 신정론을 해결하려고 시도한 (그러나 정통에서 멀어진) 선구자들의 허실을 다룬다. 과정신학자와 존 힉의 미학적 신정론이 소개된다. 
 
간주곡으로 본래의 세계관이 무너진 사람에 대한 성경 이야기(narrative)를 소개한다. 동방의 의로운 사람, 욥이 등장한다. 그는 리스본 사람의 표상이고 현대인을 대표한다. 고통받는 사람을 잘못 대하는 여러 예를 욥의 친구들을 들어 설명한다. 뒤이어 하나님의 응답이 나온다. 
 
5장은 기독교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신은 철학적인 명제의 신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온 신이다. 예수를 통해 밝혀진 신에 기반하여 위의 4가지 명제를 수정해나간다. 저자의 글솜씨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부분이다.

저자의 주옥 같은 결론(5장) 외에 주목할 만한 부분을 꼽자면 무신론자의 도덕과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이다. 신을 도덕의 기준으로 상정하기를 거절한 사람의 도덕관념은 외면이나 내면으로 향한다. 외면으로 향하는 사람은 운명의 힘을 과대평가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신, 즉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필연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사람은 대개 무신론자인데, 이들은 일상과 순간의 가치를 음미하는 엘리트주의에 빠진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재난에 맞닥뜨린 피해자와 그 가족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뜻밖의 병에 걸려 그 순간에도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순간을 즐기라는 조언은 헛되다.

과정신학은 신의 주권을 포기한 신학이다. 이 신학에서의 신은 토기장이라기보다는 온화한 설득자이며, 악에 맞서 싸우는 투사이기보다는 악의 위험을 직접 감수하고 공유하는 신이다. 과정신학의 신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지 않고 원래 있는 세상을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리모델링한다. 이 세상의 악은 더 높은(혹은 더 큰) 선을 만들기 위한 위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설명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신이 예배받을 만하지 않고 위로를 주지 않는다고지적한다. 과정신학의 신은 고통받는 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설득할 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바라는 신의 초상이 그러할까?

무엇보다 큰 문제가 있다. 이런 신학 안에서의 고통과 악은 선을 위한 대가로 환원되어 버린다. 부모의 손에 죽은 갓난아기는 대체 어떤 선을 위해 대가로 지불되었는가?
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악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욱 끔찍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의 말은 섣불리 고통을 풀어헤치려는 우리의 시도에 경종을 울린다.

우리는 신을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고 인지 밖에 있을 신과 정의, 그리고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신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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