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블랙홀 - 욕망과 잘 사귀어 나가는 길 내일을 여는 지식 철학 22
조홍길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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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욕망을 다룬 1부는 미리 갈래를 정한 뒤 사상가를 분류한 것 같다. 1부의 큰 문제는 동서양의 욕망담론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너무 적은 데 있다. 드넓은 서양 사상의 흐름을 몇 사람의 사상가로 추린 데다가 막상 면모를 살펴보면 플라톤, 에픽테투스, 데카르트, 헤겔에 20세기의 바타이유, 지라르, 들뢰즈 라캉을 더했을 뿐이다. 적다. 너무나도 적다. 허다한 중세 철학자들은 모두 생략되었을 뿐 아니라 헤겔 외의 대륙철학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영미 철학자는 말할 것도 없다. 푸코를 위시한 프랑스의 쟁쟁한 거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동양 철학으로 시선을 돌리면 문제는 더 커진다. 동양의 욕망담론을 유교, 불교, 도교로 요약학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인도철학은 동양이 아닌가?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과연 여기에 호명된 인물이 각 사상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공자, 맹자, 순자에서 바로 성리학으로 이어지는 유교의 흐름에 다른 해석이 끼어들 여지는 없을까? 양명학조차 천대받는다. 양명학이 성리학의 금욕주의를 이어받았다는 한 문장이 전부다.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혹은 생활윤리를 뛰어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책에서 건질 부분이 있다면 2부에 있다. 바로 자본주의의 욕망을 분석하는 장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난관에 처한다. 역사와 사회성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욕망이 문제가 되는 순간을 포착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저자도 동의하는 바, 욕망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윤곽을 드러내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저자는 이에 실패한 것 같다. 추상적인 단어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함정을 피하고자 자본주의를 탐구한 학자들이 욕망을 보여주는 방식은 전형적인데, 바로 욕망에 빠진 군중의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2부의 두 번째 비판점은 주류 경제학이 아니라 마르크스를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한 데에 있다. 주류 경제학의 위인들도 욕망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경제학 자체가 수요와 공급의 학문이지 않은가. 경제학을 자본의 논리로 치부하고 논의에 포함하지 않는 것은 지성인의 병폐라 볼 수 있다. 베커나 슘페터, 폴라니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케인즈와 보드리야르를 결합하기만 해도 더욱 풍성한 논의가 되지 않았을까.

사회와 역사가 결여된 논의는 3부에서 개인으로 수렴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식탁이나 떠들고 노는 노래방과는 관계가 없다. 논의는 곧장 신비주의를 향해 달려간다. 먹고, 떠들고, 땀흘려 일하는 바로 이 곳과 유리된 욕망 담론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쉬움만 남는 책이다.


p.s. 이 책의 내용이 네이버 캐스트에 요약되어 있다. 압축된 내용이 훨씬 알차다.
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903&category_id=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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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nxlady 2020-05-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욕망에 관련된 좋은 책 추천해주실만한 것 있으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한자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음이라도 병기했더라면 읽기 쉬웠을 텐데. 푸코와의 대화를 막는 진입장벽이 하나 늘었다. 지금 읽는 책이 초판본인데, 최근에 인쇄된 판본은 한글이 병기되웠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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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업가입니까
캐럴 로스, 유정식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4.

사업가를 꿈꾸는 이를 위한 체크리스트다. 대개 창업가들은 자기 스타트업을 최고로 여기기 때문이다.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고객들로 보일 테다. 이 책은 그러한 환상에 찬물을 끼얹는다. 나도 맞아봤는데, 아이스버킷 챌린지인 줄 알았다.

지금이야 창업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퍼졌겠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창업을 만만히 보는 분위기가 다수였다. 물론 결과는 완전경쟁시장에 가까운 치킨집을 봐도 알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창업가는 준비되어야만 한다.˝

만일 창업을 고민하고 있다면 가까운 서점에서 이 책을 들춰보길 바란다. 먼저 2부 8장을 읽어보자. 취미와 사업은 다르다는,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의 `컨닝 페이퍼`를 재빠르게 살펴 보자. 찬란했던 망상을 찌르는 칼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을 꼽자면 창업의 위험을 낱낱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보물지도가 아니라 위험지도인 셈이다. 어디를 걸어야 보물을 찾을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어디를 밟으면 안 되는지를 알려준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

우연에 사업을 거는 도박을 피하려면 우선 이 책이 경고하는 분야에 대책을 마련하자. 덧붙여서 사업을 시작하는 곳이 어딘지도 생각하자. 보통은 헬조선(!)이 아닐까. 계약자를 등쳐먹는 대기업과 성공의 기미가 보이면 전방위에서 달려드는 경쟁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젠장.

역자 후기를 살피면 역자 자신도 창업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자가 컨설팅 사업을 시작한 뒤 고통을 겪으며 얻은 화두를, 이 책을 번역하며 풀어냈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사업은 취미가 아니라는 결론과 함께.

보물지도를 보고싶다면 같은 역자가 번역한 ˝디맨드˝(에이드리언 슬라이워츠키, 칼 웨버)를 읽어야 한다. 고객의 수요가 곧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당신은 사업가입니까˝가 가져올 부작용을 중화해준다. 과감히 창업을 시작하려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위험을 피하려면, 이불 속으로 도피하는 수 밖에 없다.

수요에 대한 책을 한 권으로 끝낼 수는 없다. 고객은 실전이기 때문이다. 보물지도와 위험지도가 있어봤자 실행하지 않으면 관상용 지도에 불과하다. 다음에 읽어볼 책으로는 ˝린 스타트업˝(애시 모리아)이 있다. 이 책은 실리콘 벨리에서 유행하는 린 스타트업 운동의 각론이다. ˝디맨드˝는 수요에 대한 넓은 시야를 제시하고, 린 스타트업은 수요의 디테일을 가로챌 무기를 제공한다. 준비된 창업가가 되기 위한 최소 요건이랄까. 하, 그래도 부족할 뿐이다.

역자의 책 중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은 ˝착각하는 CEO˝다. 그는 이 책에서 경영과 조직에 대한 수많은 미신을 심리학으로 검증한다. 아쉽게도 최근 심리학의 재현성 문제가 대두되어 반박할 빌미가 생겼다만, 이 책의 가치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던 통념을 직시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눈을 가리던 환상을 걷어낸다는 점에서 ˝당신은 사업가입니까˝와 같은 장점을 가지고있다.

결론 : 친한 사람이 창업을 고려한다면 슬며시 추천해주는 책이다. ˝이런 건 주갤럼이나 하는 거에요. 인생을 지는 도박(...)에다 몰빵하면 못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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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를 만든 3인의 사상가 시리즈 중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사도 바오로˝는 시공사 로고스 총서 시리즈의 책을 다시 출판했다. 제목이 달라졌지만 저자와 목차가 같으니 부인할 수 없으리라 본다.

1류 석학들이 쓴 입문서이기에 살 수 있다는 사실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만 가격은 세 배 가까이 올랐다. 아아 그놈의 물가상승률...

관심이 가는 책은 아무래도 헨리 채드윅의 아우구스티누스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입문하고 싶은데 피터 브라운의 대작은 너무 두껍다. 채드윅의 것은 얇으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총체를 보여줄 수 있겠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이 중세 학계를 규정한데다가 신국론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전의 유럽 정국을 지배했다는데, 막상 그 자신의 책은 읽히지 않는다. 전에도 큰 맘 먹고 고백록(최민순 역)을 손에 들었다가 열 장을 채 못 넘기고 던지고 말았다. 중2병 돋는 문체가 문제였다.

사실 요즘 중학생들은 급식체(...)를 쓰니 맞는 말은 아니다만 무릎을 탁! 칠만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무신론자 E. P. 샌더스가 소개하는 사도 바울도 매력적이다. 샌더스는 유대인에 대한 기존 관념을 갈아엎은 학자다. 교회에선 들을 수 없는 바울의 신선한 모습을 그의 책에서 읽을수 있다.

개신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으려 노력한다`고 보았다면 샌더스는 `유대인들은 자신을 구해낸 신의 은총에 머물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본래 개신교도들이 유대인들의 열심을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헛된 시도로 여겼다면 샌더스는 그들 역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반박한 셈이다.

샌더스의 성과가 일으킨 돌풍이 여전히 바울 신학계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학식 있는 기독교도들에게는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냐`가 매우 중요한 주제기 때문이다. 그 대략을 볼 수 있는 책을 꼽자면 ˝칭의 논쟁˝(새물결플러스)이 있다. 고급반 독자께선 ˝최근 바울과 율법 연구 동향˝(베로니카 코페르스키)를 읽으시면 되겠다.

이 쪽과 관련된 이론이 이른바 칭의론인데, 관련 도서를 읽어보면 이쪽 분야가 사실은 개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데, 교인들은 중세시대에서 헤매고 있다. 구원파가 이단으로 몰린 이유가 칭의론과 구원관에 문제가 있어서이지만, 일반 교인들에게 관련 논점을 물어보면 구원파와 별 차이 없다. 어휴.





덧) 바울이든 바오로든 명칭을 통일했으면 좋겠다. 바울, 바울로, 바오로 등 한 사람을 가리키는 번역이 너무 많다. 바울은 개신교 신자가, 바울로와 바오르는 가톨릭 신자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아마 역자는 가톨릭이 아닐까

신기하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자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어거스틴은 개신교가, 아우구스티노는 가톨릭이 주로 사용하는 걸로 안다.

RISS에서 검색해보니 아우구스티누스는 학위논문이 392건, 학술지논문이 465건이 나오고, 어거스틴은 학위논뿐 580건, 학술지논문이 320건이 나오는 반면 아우구스티노는 학위논문이 22건, 학술지논문이 29건밖에 없다. 아우구스띠노로 검색해도 각각 4건과 9건이 추가될 뿐이다.

일단 알라딘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로 명칭이 통일된 것으로 보인다. 어거스틴으로 검색해도 아우구스티누스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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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의 고백 - 돈과 시장을 이긴 미완의 철학
조지 소로스 지음, 이건 옮김 / 북돋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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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의 고백
조지 소로스, 이건 역.
북돋움, 2014.


“그러나 오늘의 나를 만든 이 개념의 틀 자체는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닙니다. 사고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방법으로, 예부터 철학자들이 널리 연구해온 주제입니다.”(p.17)


조지 소로스는 네 장에 걸쳐 자신의 개념 체계를 소개한다. 1, 2장에서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오류성과 재귀성을 설명하고, 3장과 4장에 걸쳐 열린 사회와 도덕성을 덧붙인다. 이 개념들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쓸모없어 보이기도 하다. 이는 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듯 하나 결국 금융시장의 챔피언에 머무는 소로스의 정체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어설픈 철학도 행세 때문에 독자들은 여간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아쉽게도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투자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부록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로 볼 때, 자신의 설명 자체가 시장에 끼칠 영향을 막으려는 것 같다. 소로스의 선택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의 전작, “금융의 연금술”(국일증권경제연구소, 1998)을 찾아봐야 한다.

이제 그의 개념체계를 살펴보자. 먼저 오류성은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행태경제학과 심리학의 업적을 통해 인간 인식의 불완전함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소로스는 여기에 엉성한 철학적 개념을 끼얹는데, 바로 재귀성이다. 재귀성은 인간의 오류가 객관적인 현실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로스는 인간을 두 기능으로 파악한다. 한 기능은 현실을 인식하고 다른 기능은 현실을 조작한다. 문제는 이 두 기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사실이고 더 큰 문제는 소로스가 갑자기 재귀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재귀성에 대한 그의 설명은 피카소의 그림보다 혼란스럽다. 다행히 그가 말하는 재귀적 피드백 고리는 보다 명료하다.

“사람들의 생각은 사건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사건 흐름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영향이 연속적이고 순환하므로 피드백(feedback) 고리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 순환 과정은 관점의 변화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상황의 변화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p.29)

이 재귀적 피드백 고리를 설명하기 위해 소로스는 현실을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으로 나눈다. 외부 현실은 객관적이고 단 하나뿐이지만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상이 맺힌다. 현실의 주관적인 측면은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있다. 행동을 통해 현실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이 연결되면서 피드백 고리가 나타난다. 피드백 고리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긍정적 피드백 고리는 마음속의 상을 강화하지만 부정적 피드백 고리는 현실의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의 차이를 상쇄한다.


2장에서 피드백 고리는 ‘거품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금융 시장에 적용된다. 이 모델은 과학적 모델보다는 현실과 기대가 어긋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에 가깝다. 거품 모델을 설명하기 전에는 긍정적 피드백 고리와 금융 시장을 연결지은 말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소로스는 가치투자자와는 달리 금융 시장을 `장기적으로는 저울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투표 계산기`로 보지 않는다.

“나는 금융 시장이 펀더멘탈을 바꿔놓을 수 있으며, 그 결과 시장 가격과 펀더멘탈이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p.47)

소로스는 레버리지 효과를 들며 이를 간단히 입증한다. 이 문구는 소로스에게 있어 금융 시장이 일종의 아고라라는 점을 암시한다. 소로스의 아고라는 사회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는 지금은 반파된 효율적 시장가설 추종자를 반박하는 한편 가치투자자가 시장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감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실제 기업은 시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치투자자의 선택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소로스가 옳다면, 가치투자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치투자자는 금융계의 보수주의자다. 이들은 가치에 대한 신조를 고백하는 한편 현실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벤자민 그레이엄은 투자 기업의 수를 늘렸고 워렌 버핏은 기업 자체의 성장성마저 꿰뚫어보았다. 피터 린치는 기업의 인기를 생활 속에서 먼저 확인하여 이 위험을 줄였다. 조셉 칼란드로는 “투자 천재들의 가치투자 실전 운용법”(부크홀릭, 2010)에서 소로스의 거품 모델을 수용했고 이를 통해 거시 경제의 변동에서 기회를 찾으려 한다. 물론 그의 거품 모델이 현실과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재귀성 개념을 설명하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다른 두 개념은 어떨까? 3장에서는 소로스가 스승에게 물려받은 ‘열린 사회’가 등장한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조지 소로스의 열린 사회가 같은지는 잘 모르겠다. 또한 소로스의 열린 사회에서 균형이 일반적일지도 의문이다. 소로스는 열린 사회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나 목적 자체로서나 더 바람직한 사회조직 형태”(p.90)라고 단언한다.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말할 수 있는 열린 사회는 그가 바라마지 않는 사회의 이상형으로 보인다. 아마 그는 이 이상을 바탕으로 사회의 조직을 평가하지 않을까?


소로스는 4장에서 도덕성을 언급하지만 재귀성을 설명할 때처럼 횡설수설한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도덕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소로스는 도덕성의 존재를 말하고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대리인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책임의 필요설을 설파하지만, 책임의 방향성이 어디를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물거리고 만다.


나심 탈레브의 평가가 옳았다. 소로스의 책을 접하기 전에는 칼 포퍼의 사상을 실천하는 제자로 생각했었다. 탈레브는 “행운에 속지 마라”(중앙북스, 2010)에서 소로스를 치켜 올리는 와중에 그를 깎아내린다. 옮긴이의 말에 그 비판의 요지가 들어있다.

“탈레브는 소로스가 단지 지성인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 우월한 지위를 얻으려 했던 것이라고 보았다. 여자를 유혹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통하지 않자, 마침내 빨간색 페라리를 장만한 사내와 같다고 비유했다.”(p.8)

이 문장은 소로스의 철학적 소양을 날카롭게 평가하는 말이다. 예컨대, 그의 열린 사회가 합의할 균형에 과연 진리가 있을까? 객관적 현실과 진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가 말하는 도덕성과 진리의 관계는? 철학자라면 빠져들고 마는 진선미의 유혹조차 그를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소로스는 재귀성을 설명할 때 엄밀한 정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재귀성에 대한 추상적 명제들은 어설픈 아포리즘들이 가닥가닥 엉킨 실뭉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가 언급하는 사례를 종합하여 유추하는 것이다. 물론 사례를 수집하는 내내 두괄식으로 쓰인 요점들이 머리를 산만하게 휘젓는다.


소로스의 책은 내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오류성과 재귀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좋은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둘째, 소로스는 포퍼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재귀성에 대한 소로스의 횡설수설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재귀적 피드백 고리 때문이다. 재귀성으로 뭉쳐서 설명하는 인간의 두 기능, 피드백 고리, 인간 불확실성의 원리는 포퍼보다는 현상학이나 해석학에 가까워 보인다. 현상학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반성하는 능력과 해석하는 능력이 있다. 자기의 체험을 경험하는 능력과 타인의 체험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이는 소로스가 말하는 현실의 주관적 측면과 유사하다.

그가 잠깐 설명하고 지나가는 자기 재귀성도 흥미롭다. 그는 타자의 시선 자체도 나의 행동을 조작한다는 점을 놓친다. 먼 과거의 산물인 파놉티콘을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메이요와 뢰슬리스버거가 실시한 호손 실험도 불완전하게나마 이를 입증하니까. 이는 타인의 선택에도 흔들리는 금융시장 참가자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개념이다. 삶에서 마주치는 온갖 선택의 순간에도 유용하다. 나아가 객관적 현실, 진리, 영원, 가치, 나의 선택의 연결 관계에 대한 질문들도 파생된다. 그리고 균형이 아닌 세상에서 이익을 취하는 기술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로스가 금융시장에서 사용한 차익거래 말이다. 아무래도 그의 전작을 들춰봐야겠다.


그렇다면 과연 소로스는 포퍼를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소로스는 철학자의 방법을 따르는 사상가라기보다는 천재에 가깝다. 그의 사상이라고 내놓은 재귀성이 검증의 칼날이 닿지 않는 영역에 있다는 점, 스스로 고백하듯 객관적 현실을 ‘일종의 신앙’처럼 여긴다는 점을 고려한 결론이다. 사실 그가 검증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능력이었다. 그는 프랑수아 줄리앙이 “전략”(교유서가, 2015)에서 묘사한 천재적 능력을 소유했음을 보였다.

“천재적 능력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천재적 능력은 선행하는 모든 모델화들, 참모본부 회의실에서 세운 모든 계획들을 무시하고 직접 마주친 상황에서 생기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즉 ‘주도’ 요인들을 재빨리 포착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천재적 능력’은 유럽적 합리성에 파국을 드러내는 것에 구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유럽적 합리성을 파열시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계획되 행동을 갑자기 내버리고 영감과 즉흥성을 도움으로서 요청하니 말이다.”
(프랑수아 줄리앙, 전략, p.27)

소로스가 사용한 기법이 널리 알려진 자본기법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의 생각도 한 물 갔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차익거래를 해 냈기 때문에 찬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모델의 통제를 벗어난 순간을 지배했으므로. 철학적으로도 엄밀하지 않고 검증의 영역조차 빗겨가는 소로스의 개념은 그가 바라보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이해하기 힘든 개념체계들이 소로스로 하여금 모델의 측정치 너머의 영역을 직관할 수 있게 했다. 그러니 탈레브의 비평은 극찬에 가깝다. 전쟁터와 같은 금융시장 속에서, 소로스가 실제로 ‘빨간 페라리를 장만’해 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로 평가받길 바라는 소로스로서는 씁쓸하겠지만.

이제 그를 포퍼와 더불어 생각해 보자. 요즘은 자본주의의 도덕적 후유증이 드러나는 때라 그런지 사상적 문맥을 드러내는 자본가들이 눈에 띈다. 자본주의의 적자 중에 사상가를 등에 엎고 활동하는 사람을 하나 꼽자면 피터 틸이 있다. 그는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자본 속에 녹여내는 사람이다. 그와 소로스를 비교해보면 지라르와 포퍼 이론의 윤곽이 드러난다. 공통점은 둘 다 전체주의를 싫어하고 이론 속에서 군중을 다루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사업가에서 투자자로 변한 틸의 커리어는 지라르 이론의 다산성을 보여준다. 마치 포퍼 이론의 다산성을 소로스가 보여주었듯 말이다. 그렇기에 과거 여러 나라의 통화 체제를 황폐화시키며 보여준 소로스의 비도덕성은 포퍼의 한계일 수도 있다. 포퍼를 읽어가며 짚어봐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1장에서 사회과학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소로스의 비판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심지어 한 발 더 나가고 싶다. 도대체 이들은 왜 사회를 바꾸려 하지 않는가? 내로라 하는 지식인이 대부분 안전지대에서 몸을 사리는 것 같다. 이미 진흙탕과 단단히 묶인 상황인데, 그 길을 밟는 게 그토록 두려운가? 소로스와 틸을 사회에 참여하게 몰아가게 하는 것은 그들의 사상가가 진단한 현대의 위기다. 이 사회의 임박한 파국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지식인들이 내게 보이지 않는 데서 노력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마는, 사회를 바꾸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쓰고 있다고 자평하는 소로스가 사회에 더 도움이 될까 두렵다.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가 평가하듯, 새로운 경작물을 자라게 한 농부가 철학사 상의 모든 현자보다 인류에 공헌을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실리콘벨리의 창업가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 같다. 사상가들은 자본의 논리를 좀 더 공부해야 한다. 안전지대에만 머무르거나 학교로 도피하지 말고 자본주의 안에서 싸우는 이들이 필요하다. 조지 소로스와 피터 틸처럼.

끝으로 책의 번역 혹은 편집에 대해 아쉬운 점 하나만 지적하자. 진리관에 대해 명확한 주석이 없다는 것이다. 1장의 재귀성을 설명하는 부분에 명제적 진리를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그가 나름대로의 진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에서 다루는 진리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다면 소로스의 생각을 이해하기 좀 더 쉬웠지 않았을까.

내가 읽은 책이 2014년 개정판인데, 소로스가 스승으로 모시는 칼 포퍼(Karl Popper)를 ‘카를 포퍼’로, 자유주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을 ‘아이제이어 벌린’으로 옮긴 걸 고려하면 편집자가 정말 이 방향에서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다. 최고의 투자 전문 번역가를 모셔온 것을 보아하니 이 책을 투자 철학서로만 여긴 것 같다. 아아 현실의 주관적 측면이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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