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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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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라노 게이치로는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작가적 출발기의 이러한 경험은 아무래도 작가에게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부정적인 차원의) 그 어떤 경향성을 내면화시켜버린 것 같다. '일식'은 관념적 요설로 뒤덮힌 작품이다. 감성과 내면에만 파묻힌 사소설과 신비주의와 낭만주의로만 질주하는 환상소설, 아니라면 이념과 규범의 화신들이 난무하는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일본 순수문학계의 풍토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을 지닌 인문학적 담론을 뿜어대는 이 젊은 소설가가 심사위원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아쿠타가와가 주어진 것은 아무래도 작품의 성취 자체보다는 뉴 웨이브를 지향하는 그 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의 재림'이라는 이러한 평단의 호들갑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 반응 역시 진지한 차원의 공감이라기보다는 얕은 지적 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세련된 지적 포즈를 지닌 사이비 지식인들의 부화뇌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일식'에서 내가 건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아쿠다카와상은 순수문학, 정통문학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신인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따라서 똑같이 신인에게 주어지는 상이지만 대중문학에 주어지는 나오키상에 비해 의외로 오류를 범할 확률이 높다. 대중문학의 경우 재미와 구성 면에서 어느 정도의 보편적 공감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신인상을 받기 힘들다. 따라서 나오키상 수상작을 택할 경우 대부분 탁월하지는 않더라도 평타 이상은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순수문학의 경우 신인상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작품의 수준 자체보다는 그 패기와 숨은 자질을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죽어가는 순수문학을 부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일식'은 가끔씩 번뜩이는 사유를 보여주기는 한다. 그리고 강렬한 이미지의 결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두 줄의 번뜩이는 사유를 만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양의 무가치한 현학적 잡설들을 거쳐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잡설들은 대부분 자신이 위치한 서사의 흐름에 거의 녹아들지 못한 채 물에 뜬 기름처럼 뜬금없고 황당한 모습으로 서있다. 물론 관념적 잡설로만 소설을 쓰는 파스칼 키냐르도 있다. 하지만 키냐르는 좀 다르다. 그의 관념적 서술들은 수준이 높고 맥락이 있다. 그리고 서사와 이미지 자체는 맥락이 없지만 그것들은 관념적 서술들의 맥락에 어느 정도 조응한다. 또한 '일식'은 자동적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데 사실 '장미의 이름'과 '일식'을 비교하는 것은 전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장미의 이름'은 서사 자체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며 관념적 서술과 서사의 흐름이 완벽하게 혼연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신학적 교리와 철학적 개념들을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도 단숨에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할 정도의 파격적인 수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 작가가 계속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쓰면서도 계속 어느 정도의 평가와 판매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다. 물론 역시 비슷한 코드를 수십년 째 답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에 거론될 만큼의 문학적 성취와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하루키도 있다. 하지만 하루키의 경우, 그것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사람조차도 그러한 반응의 이유를 정서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히라노의 경우는 왜 그런 현상이 가능한 것인지 거의 이해하기 어렵다. 내 생각에는 작가나 독자나 타성인 것 같다. 그냥 자민당을 찍는 현상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것이 계속 지지를 받으니까 잘하고 있는 줄 알고 계속 하는 것이고 독자 역시 다들 그것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렇게 큰 자신은 없지만 그냥 괜찮다고 말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혹은 관념적 수사로만 가득찬 글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읽는 자신에 대해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싶은 관념적 허세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 히라노는 창조적인 작가가 아니다. 그의 소설은 거의가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들에서 그 모티브를 빌려오고 있으며 스무 페이지도 안 될 빈약한 모티브를 현란한 요설로 가득 채워 1000페이지의 분량으로 늘린 것이다. 물론 문제는 늘려놓은 양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한 줄이면 끝날 묘사를 열 줄로 늘린다거나 거의 무의미한 배경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하나의 습관인 것 같다. 그리고 정말로 난데없이 나타나서 기어이 갈데까지 가보고야 마는 철학적, 미학적, 정치적, 사회적 발언들은 신문이나 인문학 서적을 전혀 읽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주어진 서사나 장면과의 조화를 생각한다면 가끔은 습작을 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발언 자체가 어느 정도의 수준을 지녔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대부분 의미와 논리의 맥락이 다섯 줄 이상 이어지지 못한다. 서른 줄의 말을 하는데 적어도 일곱 번 이상의 논리적 분절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얼핏 보면 연속성을 지닌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짧고 강렬한 아포리즘인 것인가. 하지만 전혀 강렬하지도 함축적이지도 시적이지도 않다. 그냥 다시 추리고 정리하게 위해 일단 마구 써보는 리포트의 초고 같다. 히라노는 자신의 글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 같다. 즉 머리 속에서 나온 말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의무적으로 무슨 말이든 들어주어야 하는 절친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모든 말들을 다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무엇을 깨달아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작가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아닌 것이다.


- 지금까지 비판적으로만 말했지만 물론 히라노가 형편없는 작가는 아니다. 단지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가치를 실현하기에는 수준이 낮다는 것이고 그에게 주어진 명성에 비해서는 내공이 부족하다는 것일 뿐이다. 이 작품을 읽는 것은 모두에게 시간낭비는 아니며 다음과 같은 의의 정도는 있다.


- 우선 인간과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가감없는 진실이 드러나있다는 것이다. 입밖으로 꺼내놓기조차 망설여지는 인간의 원초적 내면. 즉 친구나 가족에게조차도 우리는 그 말과 행동과 삶의 방식에 대해 이유없이 얼마나 많이 짜증이 나며, 또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가끔은 왜 그렇게 도에 지나친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일까, 유적 차원의 문제일까. 그리고 바로 그러한 불합리한 것 때문에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은 그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했다는 신문의 그 논리적 배경설명들은 정말로 다 믿을 만한 것일까.


- 다음으로 앞서도 말했듯이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예술과 과학에까지 걸친 다양한 영역의 지적 언술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이 단순한 감정의 배출이거나 추상적 교화 아니면 흥미의 추구라는 선입관, 또는 그러한 것들이 무가치하다는 선입관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지적 정보로 가득찬 소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적 언술들은 역시 전술한 바와 같이 서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폭포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적어도 양적 차원에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 다음으로는 논리를 지니고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미래파 살인자들의 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범죄는 사적인 원한이나 동기를 지닌 단순한 일탈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사회적인 것이거나 나아가서는 문명적인 것이며 때에 따라서는 아주 진지한 내면적 가치의 발현이다. 물론 이러한 살인자상은 바그너를 들으며 시체를 토막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물들로 인해 정서적으로는 이미 일반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이제 그러한 정서적 차원의 이미지를 넘어서 지적 차원의 논리적 언술로 그러한 살인자들의 내면과 철학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주인에게 목줄이 묶인 노예야! '행복'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 그것은 퍼내틱하고 에로틱하며, 열렬하기 그지없는, 가장 세련되고 첨예한 현대의 파시즘이야."

스스로 전면에 나서지 않고 타자의 의식을 조종하여 제노사이드를 기획하는 유지나 무비판적인 행복의 추구를 자아 없는 노예적 굴종으로 보아 료스케를 살해하고 스스로에게는 그러한 살인의 충동마저도 자아의 실현으로 합리화하는 도모야는 대중성명문을 발표할 만큼 자신의 범죄에 대한 아주 분명한 철학을 지니고 있다. 엽기적 범죄 따위가 이처럼 논리적 언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옴진리교 사건 같은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본사회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결괴'는 '방죽이나 둑 따위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다 물에 밀려 한꺼번에 터져 무너지다.'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결정적 붕괴'라는 뜻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본인들이 참으로 다양한 어휘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자주 감탄한다. (일본어에는 없는 말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의 폭이나 깊이보다는 사실 필요한 말이 있으면 얼른 만들어내고 좋은 말이 있으면 얼른 베껴내는 기술적 차원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결괴'는 현대문명의 외면적 평화와 내면적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파멸은 점진적 악화를 통해 서서히 다가오지 않는다. 파멸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는 지면 아래 에서 은밀히 진행되다가 표면의 내력이 임계치에 달하는 순간 찰나적이고 전면적으로 온다. 즉 파멸은 '단 한 순간의 결정적인 파국'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다. 비행기 프라모델을 만들어본 사람은 안다. 여러 번 부딪치고 떨어져도 그것은 신기하게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의 내성에 놀라며 조금씩 처음의 조심스러움을 잃고 이제 그것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조금씩 금이 가고 나사가 한두 개씩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내성의 임계치에 이르는 그 어느 순간 아주 약한 단 한 번의 부딪침만으로 그것은 허무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튼튼하지 않다. 그것은 은밀하게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그것은 한순간의 결정적 파국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웃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보여서라는 한 가지 이유로 아무 상관없는 지나가는 여학생을 충동적으로 살해하고 말았다는 어느 고교생의 기사를 읽는 순간 나는 결괴의 징후를 느낀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느꼈을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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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국에서 - 자아만 있고 주체는 없는 젊음의 비극
    from 새벽님의 서재 2013-12-02 02:42 
    "솔직히 요즘 케이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뉴욕에 갔다 온 뒤로 시작된 증세였다. 돌아온 뒤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덜 떨어지게 느껴졌다. 특히나 사람들이 그랬다. 세련되게 젊음을 탕진하는 귀여운 백인 여자애나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어딘가 천재 같은 유대인은 서울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은 점은 있었다. 하지만 나쁜 점도 그만큼 있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다. 돌아온 뒤,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