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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단 한 순간의 결정적인 붕괴
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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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요즘 케이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뉴욕에 갔다 온 뒤로 시작된 증세였다. 돌아온 뒤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덜 떨어지게 느껴졌다. 특히나 사람들이 그랬다. 세련되게 젊음을 탕진하는 귀여운 백인 여자애나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어딘가 천재 같은 유대인은 서울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은 점은 있었다. 하지만 나쁜 점도 그만큼 있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다. 돌아온 뒤, 모든 게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하나같이 어정쩡했고, 그 점이 정말이지 짜증났다."

 

- 누군가 내게 이 소설의 스토리를 얘기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할 것이다. 스토리상으로 이 소설은 전혀 신선하지 않다. 그저 모여서 춤추고 놀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여기저기 드나들고 이것저것 치장하는 젊은 애들('젊은이'라고 하긴 좀 그렇다. 어쨌건 '젊은이'라는 말에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는 거니까)의 이야기일 뿐이다. 드라마나 영화, 또는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찌보면 화려하거나 발랄해보이고 어찌보면 한심하거나 허무해보이는, 소비문명사회의 외면적 화려함과 내면적 공허함에 대한 흔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스토리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날의 소설에서 스토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문장과 대사이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꽤 괜찮은 문장과 대사들이 나온다. 그 내용이 깊은 의미가 있다거나 깨달음을 준다는 차원에서 괜찮다는 것이 아니다. 캐릭터의 내면을 아주 실감나게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뚱맞게 깊은 의미나 깨달음을 주는 문장들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인 것이다.)

  
-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소진. 그 자체이다.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그저 주어진 것을, 아무런 창조와 발전도 없이, 즉 다시 무엇을 만들어내는 계기조차 되지 못한 채 그저 써버리기만 하는, 그리고 따라서 조만간 그 바닥이 드러나게 될 것임이 아주 분명하다는 의미에서의 소진. 그렇게 많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또 불꽃처럼 한 순간에 다 써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탕진조차도 아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탕진'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 그저 점진적으로 바닥에 가까워지는 소진일 뿐이다. 커피도, 만남도, 사랑도, 젊음마저도 바로 그러한 소진의 이미지일 뿐이다. 캐릭터를 둘러싼 문장과 대사들은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나 드라마의 이미지들보다 더욱 처절하게 그러한 소진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 이 소설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는 받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무너져있는 느낌을 우리는 받을 수 있다. 소설이란 장르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보여주어야 하는 장르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아주 훌륭하게 현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한 번씩 가지게 되는 그 어떤 느낌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가장 큰 사건이다. 중세 역시 그러한 시대였다. 삶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과 전혀 다르다. 하나는 중세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인한 실제 현실이야 어찌되었건간에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의 부재를 곧 안정과 평화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주체로 인식되고 있거나 때로는 그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사건을 만들 수도 없으며 우리에게 사건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이 소설 속의 캐릭터들처럼 그저 아주 조그만 주어진 것을 끝없이 소진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주체가 아니다. 사건을 창조하는 주체도 아니며 주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도 아니다.


-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삶은 불안과 혼란이다. 그렇다면 사건의 부재란 비극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불안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다 무너진 폐허이다. 너무도 분명하고 확고하게 무너진 폐허여서 다시 무엇을 세울 수도 없고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다.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기에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일 뿐이다. 소설이 사건들에 대해 얘기하던 시대가 있었다. 멀지도 않은, 바로 한 세대 전의 이야기였다. 돌연 일어난 사건들은 삶을 고통과 혼란에 빠트렸고 사람들은 참을 수 없이 비참해졌다. 하지만 사건은 사람들을 주체로 만들었다. 사건을 수습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목표와 의지를 지닌 주체로 다시 태어났다. 문제적 개인의 희생이었건 하나된 집단의 눈물이었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와 세계는 놀랍게도 이전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따라서 사건은 고통과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희망이자 발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그 사건들로 인해 주체가 되고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국가와 사회의 영웅이 못 된다면 친구와 가족의 영웅이라도 될 수 있었고 그조차 못 되어도 적어도 자기자신만의 영웅 정도는 될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사건이 없는 세계, 모든 것이 너무도 확실히 무너진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삶을 견뎌야 하는 걸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써머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여자애였다. 왜냐하면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절대 심심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걸 케이는 원하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뭔가를. 삶의 모든 지루함을 날려버려줄. 그런 걸 얻을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 어떤 위험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물론 그건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였다. 케이가 원하는 건 그저 사람들이 우와, 하고 부러워 할만한 것들, 근사해 보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보란 듯이 젊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 세계를 견디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결사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매일의 일상을, 마치 거대하고 중요한 것인 양 포장하는 것이다. 즉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을 거대한 사건으로 포장하고 마침내 그것을 역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저기 페이스북에서는 수많은 자아의 역사책들이 칼라풀한 화보와 함께 씌어지고 저장되어 인류가 멸망할 그날까지 영원히 전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과 에피소드를 조금이라도 더 세련된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즉 역사의 미학적 가공이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는 주체이고 또한 우리의 삶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삶, 그 나만의 역사는 한없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매년 두 배씩 늘어나는 디지틀 카메라의 화소 숫자처럼 말이다.


-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삶,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말하는 천국이다. 카페에 가고 클럽에 가서 사랑을 하고 마약을 하는 것. 그것은 광고의 이미지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스스로를 아주 적극적으로 속이지 않는 한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이 거대한 거짓이라는 걸. 무엇보다 그것들은 모두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영화도 광고도, 카페도 클럽도 모두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네모로 가두어 그 바깥을 잘라내거나 차폐하지 않고서는 그것은 존재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조그만 네모 바깥에는 무한의 크기로 펼쳐진 피 흐르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처럼 쉽게 현실을 깨닫는 길을 택하지 않고서 이처럼 어렵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속이는 방법을 택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전혀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삶의 허무를 견뎌야 하는, 그보다 만 배는 더 큰 어려움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유례 없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인해 역사상 유례없는 인간적 연대가 이루어진 결과 인류는 마침내 극장과 티비와 인터넷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조그만 사각형의 공간 안에 제각기 들어앉아 조그만 사각형 프레임 속의 이미지들을 열심히 조작해냄으로써 우주 전체에 해당하는 거대한 현실을 모두 가리고도 남을 만큼의 거대한 이미지의 휘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치 자유의 여신을 없애버린 데이비드 카퍼필드처럼 말이다.

 

" 그래, 거기는 천국이었어. 그런데 여자는 울어.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여기는 천국이야. 근데 왜 나는 울고 있냐고? ....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야.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데 여기가 천국이래. 근데 천국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잘못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행복해하지 않는 너라고. 슬퍼하고, 화가 나는, 이 천국을 부수고 싶어하는 너야. 이 천국을 의심하는 너야. 왜냐하면 여기가 천국이라니까! 너는 천국에 있는 거라고. 네가 이상한 거라고."

 

하지만 조금 더 똑똑한 척하고 싶은 부류도 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은, 그리고 서로가 거짓임을 아는 대화를 웃는 낯으로 계속해대는 짓은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는 것이다.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기를 쓴다고 해서 이루어질 것도 없고 기를 써서 이루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 다할 때까지 끝없이 소진하다가 바닥에 부딪칠 뿐이라는 것을. 삶의 비극과 허무를 울부짖지 않고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세련됨. 타고난 주어진 몫이 적다면 구질구질하게 아껴쓰지 말고 한꺼번에 터트려버리고 죽어버리자는, 왠지 니체를 슬쩍 샘플링한 흔적이 보이는 적극적 허무주의.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젊은이들의 신흥종교인 '쿨(COOL)교'인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체념에서 오는 달관인 것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 선조들이나 불교의 선사들이 지난한 고통을 겪고서야 마침내 얻어낸 그 지혜의 세계관과 닮아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 그리 젊은 나이에 그리 높은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의 이러한 적극적 허무주의, 즉 쿨함은 한마디로 완전한 사이비이며 그 역시 하나의 허구적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진정한 현실을 만난 적도 진정한 고통을 겪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와 선사들은 실제로 지옥에서 살았다. 지옥에서 견뎌내는 법은 둘밖에 없다. 지옥을 바꾸거나 의식을 바꾸거나. 굶으니 살 안 찌고 좋지 않느냐는 식의 피 어린 달관이 지옥을 바꿀 수 없었던 우리 선조들의 피 어린 지혜였다. 하지만 마약을 하는 아이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처럼, 오늘날 젊은이들의 허무는, 비극적이면서도 왠지 개그 같은, 착잡한 연민을 자아내는 허구적 이미지일 뿐인다.

 

"내가 요새 케이 양 나이대 애들을 보면, 시기, 질투가 아니라, 진짜 그런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아주 그냥 뭐냐, 수족관 속 물고기들 같아요. 온화한 열대 바다도 아니고 진짜 완전 수족관. 그래, 요새 수족관들 별거 별거 다 있더라. 진짜 바다 같애. 그래서 거기가 진짜 바다라고 믿어버리는 거지. 근데 그거 진짜 바다 아니다? 내가 진짜 바다에서 살아봐서 알거든?"

 

적극적 오인과 허구적 체념 사이를 오고 가며 인공낙원에서의 피폐한 삶을 이어가던 케이는 현실을 아는 어른이자 연민을 지닌 아버지처럼 느껴지는 아저씨를 찾아간다. 그것은 그녀가 어느 정도는 성장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케이에게 바로 위의 대사와 같은 어른스럽고 따뜻한 얘기를 해준다. 하지만 그 아저씨의 손은 점점 울고 있는 케이의 가슴께를 향한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저씨는 사실 케이 같은 또래의 여자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대단히 짐승같은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어쩌면 케이에게 자신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케이가 정말로 인공낙원을 벗어나 진흙탕의 현실을 자신의 두 다리로 단단히 버티고 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아저씨다. 즉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피 흐르는 현실인 것이다. 적을 알지 못하고서 적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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