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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엔진 ㅣ 놀북 시인선 1
정규원 지음 / 놀북 / 2021년 11월
평점 :
정규원 시인은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문의 옥새봉 농장에서 구절초 농사를 짓는 지구 농부다. 우리가 흔히 미화하기 쉬운 시인이 아니라 '호미 쥐고 밭에 나가'는 농부이자 '분노와 두려움이 심장계통의 치수(治水)로 다스려지는 것이라면/ 흘러가는 곳곳을 터주고 발라준 것과 장마전선의 한가운데서 두 팔을 벌린 당신을 칭찬해야 마땅'(<장마의 심장>)한 지구의 심장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이자 '사랑과 투쟁의 깃발, 펄럭임 소리, 진화의 벼랑에 선 존재들'(<기러기 엔진>)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자 단가短歌 한 자락을 구성지게 부를 줄 아는 지구 농부여서 오히려 시가 그의 가슴에 들어와 잘 놀다 가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했던 삶을 구절초 농장 절터에 묻고 두루봉 동굴(‘흥수 아이’ 유적으로 알려진)의 용을 기다리는 천진한 청년이자 농부로 다시 사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폭포에서 떨어져 하얗게 부서진/나를 만나고/빗물에 쓸려온 벌건 흙탕물 나와 만나/말없이 비릿한 몸을 누이고 밤길을 가는 강이다.”(<나의 길은 강이다> 부분)처럼 뼈를 맞춰 길을 만든 시로 시작하지만, “이 땅이 뉘 땅인지/한 번 붙어보자 퉤퉤/똥을 눠도 내가 더 많이 눴다 이놈아”(<멧돼지> 부분)하고 발을 구를 듯한 시는 흥미롭다. 구절초 농장이 있는 산벚나무 숲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엔진을 만들어낸 것은 진지하고 결연하기도 한 시인이자 농부의 자세이면서 시대의 아픔에 연대할 줄 아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통증과 연결과 자유에너지와 여행의 함수관계는 기러기 엔진의 다이나믹한 성능을 보장하고 사랑과 투쟁의 깃발, 펄럭임 소리, 진화의 벼랑에 선 존재들, 심장에서 날개의 움이 트려고 하늘은 새파랗다.(<기러기 엔진의 구조> 부분)
그러니 시인이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그가 직접 농사지어 찌고 말려 내놓은 ‘구절초 차’를 마시며 지구 농부의 땅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시가 삶과 따로여서 뻔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넘겨짚지 말고 시집 한 권 사서 기꺼이 그가 일군 땅의 시학으로 육박해 들어가보면 어느새 ‘기러기 엔진’의 구조로 창공에 올라서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