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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평점 :
궤도
#도서제공
‘궤도’는 90분에 한 번씩, 하루에 총 16바퀴를 도는 우주선에 있는 우주 비행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책이다. 여섯 명의 우주 비행사가 이 우주선에서 생활하지만, 누구 하나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 아니라 그들이 우주선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짧은 분량의 책이고 꽤 속독한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이 책은 절대 빨리 읽을 수 없었다.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읽게 되는 매력이 있어 더디게 읽었는데, 글의 묘사가 아름다워서 문장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먹으며 소화시키느라 완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광활한 우주에서 태양이 지구를 비추며, 어둠 속에 잠식되어 있던 지구가 색을 되찾는 순간의 묘사가 참 좋았다. 담백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구의 아름다움이 더 잘 나타나는 묘사인 것 같다. ‘궤도’를 읽다 보면 우주에 나가지 않고도 지구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책을 읽는 나조차도 우주비행사처럼 지구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주 비행사들은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지구에 남아있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우주선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선망의 대상이며 유토피아 같은 곳이다. 그들이 실제로 살았던 곳이지만, 현재 갈 수 없기에 그곳에서의 기억이 미화된 곳이다. 우주 비행사들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내 기억 속의 지구와 실제 지구는 다를 수 있다고.
지구에서의 삶은 중력이 작용해서 다리 근육을 사용해서 걸어야 하고, 사람이 부유하지 않으며, 체내 시간 감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곳이다. 그러나 우주 비행사들은 이미 우주선에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들은 1분을 어림하여 셀 때 1분 30초가 걸리기도 하고, 45초가 걸리기도 한다. 지구에서의 삶을 위해 매일 운동을 하려 하지만, 우주선은 중력의 작용을 받지 않기에 근육이 계속 빠진다. 그들은 자신이 지구에서 제대로 적응해서 살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그래서 지구가 아닌 우주선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는 듯하다. 어쩌면 이들은 허무와 체념을 습득한 게 아닐까.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고 계속 그리워하더라도 당장 갈 수 없으니, 그리움과 공허함을 체념으로 학습한 게 아닐까.
우주선 내에서는 국가도 인종도 성별도 중요하지 않다. 결국 그들만이 느끼는 고독과 유대감은 지구에서 사는 사람과는 나눌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연대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그렇기에 ‘궤도’를 읽고서 내가 지금 존재하는 이 곳이 새롭게 보였다.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음에도 중력으로 발을 붙일 수 있음에 감사하고,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우산을 쓰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갑자기 내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이 모든 일상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해졌다. 그래서, 이 지구의 환경이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순간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도록.
서평에서 지구 예찬을 펼쳤지만, 책은 오히려 우주의 광활함이나 우주선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백하게 묘사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구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고 우리가 보내는 매 순간 순간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우주에 나가보지 않았음에도 우주를 경험한 것처럼 묘사한 작가님의 필력에 매 순간 감탄하며 읽었다.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나라 간 경계조차 잘 보이지 않기에 이 지구 안에서 싸우고 탐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독자들은 자연스레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전쟁과 폭력이 만연한 요즘에 가장 어울리는 책이다. 지금까지의 SF소설과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라, SF를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어서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읽어보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