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하기 불편한 기분이었다. 사물의 본성에 내재한 무엇인가가 암암리에 내게 적대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내 오랜 확신을 약화시키는 느낌. 마치 집의 튼튼한 기초 아래의 땅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떨림이 생겨난 듯했다.-32쪽
달리 살려고 하면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54쪽
일이 망가지는 시점은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때예요. -72쪽
나는 인생의 절반이 부정(否定)이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서조차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본 체하기로 결정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74쪽
환상이 있다. 정상적인 하루는 정상적인 다음 날을 예고하고, 날마다 우리 삶의 수레바퀴가 완전히 새롭게 회전하지는 않는다는 환상. 우리의 삶이 행운의 여신의 변덕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말이다. -80쪽
의심은 산(酸)이다. 산은 물건의 매끄럽게 반짝이는 표면을 먹어 치우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의심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고, 오랜 신뢰와 헌신의 수준을 차례차례 부식시키며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간다. 의심은 언제나 바닥을 향한다. -114쪽
의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파괴할 수 없다.-155쪽
진정한 대화란 희망과 꿈의 무게를 담고, 가식적인 허울을 벗어버리며, 드러난 빛 속에 서로의 얼굴이 빛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대화란 삶에 관한 것이고, 그 삶을 이겨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가 배운 교훈에 관한 것이다. -247쪽
나는 집에 온실을 갖고 있는데, 내가 특정 씨앗을 주문하면 대개 예상했던 것과 같이 그 씨앗이 옵니다. 장미를 주문했으면 장미가 오는 식이지요. 그러다가 한 번은 내가 주문한 게 아닌 것을 받게 됩니다.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것이 온 겁니다. 제라늄이나 뭐 그런 게 온 거지요. 나는 씨앗을 뿌리고 장미를 기대하고 있는데, 결국 나온 것은 제라늄이에요. 그 시점에서 나는 계획을 바꿔야만 합니다. 원래 내가 바랐던 장미인 것처럼 물을 주고 거름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나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좋아, 이건 제라늄이야. 절대로 장미가 될 수는 없지. 하지만 적어도 건강한 제라늄으로 자라도록 가꿀 수는 있어. 제 말뜻을 아시겠죠? 나는 적응해야만 합니다. 주문한 것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요. -249쪽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부담감을 느꼈고, 내 짐을 나눠 져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생겨났다. 그 순간, 그렇게 짐을 나눠서 지는 것이야말로 결혼이 갖는 본연의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혼생활에 대한 수천 개의 농담을 듣고 웃어왔다. 아무튼 결혼이란 얼마나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는가. 한 사람과 일생을 함께하는 가운데, 그 남자나 여자가 가장 격정적인 욕구부터 일상적인 것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종류의 욕구들을 다 만족시켜줄 거라고 기대하는 일은, 척 봐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결혼이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겠는가. 홀연 나는 깨달았다.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내가 필요로 할 때 거기 있어 줄 거라고 신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결혼의 가치가 유지됐던 것이다. -286쪽
우리의 무의식에는 살아온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고,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상태로 밀어놓은 미제사건 파일이 존재한다.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너무도 고통스럽고 안타까워 무의식 속에 밀어놓은 사건 한두 가지가 없겠는가? 그런데 어느 날, 이 모든 무의식의 미제사건들이 '진실을 알고 싶다'는 충동의 힘을 업고 한꺼번에 아우성을 친다면? 걷잡을 수 없이 의식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그것도 의심이라는 감정의 색깔을 띠고서... 두렵기 짝이 없을 것이다. -347쪽
우리 마음속의 의심과 오해는 세상을 보는 틀을 한꺼번에 바꿔버린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고통스런 문제 대부분은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나름의 해석으로부터 온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천여 년 전 에픽테투스도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는가.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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