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구판절판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 서효인, '저글링'에서-7쪽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 안 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하고 만다는 핑계도 대지 않아. 개개인의 정의 실현이라면 그거야말로 웃다 숨넘어갈 소리지. 하지만 말이다, 쥐나 벌레를 잡아주는 대가로 모은 돈을, 나중에 내가 쥐나 벌레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런대로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36쪽

손톱을 단정하게 자르고 매니큐어를 바르지 앟는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부피와 질량을 감추는 수백 가지 소극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다. 철저하게 검박은 손톱은 고무찰흙에조차 상처를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여 손톱 주인에게 내재한 공격성을 가리는 역할도 한다. -52쪽

그럼에도 1년에 한 번 초보적이나마 건강검진을 받는 것을 조각은 잊지 않는다. 그것마저 건너뛰어버리면, 혈압이 아슬아슬하게 정상 범위에 들어가며 당뇨가 없다는 정도의 간단한 사실조차 서류상 수치로 확인하지 않으면 자신이 스스로의 몸을 심각하게 방기하는 것만 같은 초조감이 들어서다. 몸이 어떻게 변하가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방역업자는 다음번, 잘해야 다다음 번 업무에서 실패하며 실패의 형태는 대부분의 경우 업자 자신의 죽음으로 찾아온다. -57쪽

조각은 최소한 신뢰를 크게 잃은 채로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은 이 일에 애정이 있었는데, 대놓고 애정이라고 하기엔 이 일의 성격상 좀 뜨악한 표현이고 몸을 움직여 일하는 데에 대한 집념이나 원년 멤버로서의 집착 내지는 나 아니면 할 수 없단 식의 고집이라고 부르기에도 적절치 않은, 말하자면 탯줄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그것도 간신히 영양을 공급하다 불현듯 아이의 목을 단단히 감아버린 탯줄로, 언제 죽음으로 이어질지 모르는.-92쪽

바다를 동경하는 사람이 바닷가에 살지 않는 사람뿐인 것처럼. 손 닿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이감과 숭고한 대상화.-96쪽

그가 이 일에 흘러 들어온 건 순전히 자신의 의지였고 선택이었다. 의지나 선택이라는 말은 왠지 거창한 계획의 일부라는 되는 것만 같은데 정확하게는 어쩌다 보니, 였다. 그가 한 모든 일 가운데 필연적인 것은 많지 않았다. 짊어진 업을 또 다른 업으로 해소하듯이 꼭 이 일을 해야만 내가 살겠다는, 신열을 앓는 새끼무당 같은 절박한 마음이 든 것도 아니었고-126쪽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이었다. -127쪽

집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살아있는 것에 인사를 하게 될 줄은, 집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거나 또는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할까 봐 초조해질 줄은, 자기 인생에서 그런 날이 다시 올 줄은, 무용을 데려오기 전에는 몰랐다. -138쪽

무언가를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면, 설령 그것이 가벼운 인사일 뿐이라도,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167쪽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236쪽

아무리 구조가 단단하고 성분이 단순 명료하다 해도 사람의 영혼을 포함해서 자연히 삭아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물건은 노후된 육체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 단절되며 가능성은 협착된다. -276쪽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283쪽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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